6.25전쟁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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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이렇게 치른 6.25전쟁은 대체로 4단계를 거치며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북한군의 남침기(1950. 6. 25 ~9. 15)로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 선까지 이르렀던 시기를 말한다.
둘째 단계는 유엔군의 북진 및 반격기(1950. 9. 15~ 11. 25)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 소련과 만주 국경의 초산-혜산진 선까지 진격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셋째 단계는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의 재반격기(1950. 11. 25~51. 6. 23)로 중공군의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천 선(37도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하게 되는 기간까지를 말한다.
넷째 단계는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6.23~1953.7.27)로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쌍방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이들 전쟁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북한군의 남침단계, 50.6.25~9.15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그들의 남침공격대로 38도선 전역에 걸쳐 야포와 박격포의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를 상륙시켰다.

서울을 목표로 정한 북한군의 주공집단인 제1군단은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과 문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하였고, 춘천, 강릉을 목표로 한 조공집단인 제2군단은 화천-춘천 접근로에 중점을 두고 소련제 T-34전차와 76밀리 자주포를 앞세우고 일거에 국군의 38도선 방어진지를 돌파한 후 남진을 계속했다.

기습공격을 받게 된 국군은 우선 전방 방어 병력만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후방 주둔 사단을 긴급히 전방으로 이동시키면서 이에 대응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38도선이 돌파당하고 6월 28일에는 서울과 춘천, 그리고 강릉이 적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 국군은 한강 이북지역에서 철수한 병력과 이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병력을 통합하여 임시로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하에 한강방어작전을 수행하여 7일간을 그곳에서 지탱한 후에 7월 4일 한강선을 돌파당하게 되어 평택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때 중부전선에서는 7월 2일에 원주가 점령당하고, 동부전선에서는 7월 4일 삼척이 점령된 후 지연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고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미 제24보병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국군은 7월 4일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여전히 상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채 북한군의 계속적인 압력에 밀려 차령산맥-금강-소백산맥 선에서도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부득이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인 마산-왜관-영덕을 연하는 선까지 물러나게 되었다.

그 동안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고 미 제8군사령부도 대구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이양되었으며 유엔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는 등 6.25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유엔군의 작전지휘체제와 기반이 갖추어졌다. 이 때 국군도 2개 군단 5개 사단으로 재편성되어 전쟁 직전의 병력 수준으로 전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소한의 전투경험도 쌓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북한군은 그 동안의 계속된 공세행동으로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게 되어 사단의 전투력은 50~60% 수준으로 감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보충이 뒤따르지 못하였으며. 병참선은 300여 km로 신장되고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등 전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세작전이 거의 한계점에 이를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을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이르는 240km에 달하는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하고 비교적 조밀하게 압축된 방어지역에서 전세 만회를 위한 방어태세에 임하고 있었다. 이 낙동강 방어선은 국군과 유엔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고 반격작전을 위한 교두보이기도 하였으며, 일명 부산교두보 또는 워커 라인(Walker Line)이라고도 불리었다.


낙동선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8월 5일부터 낙동강 도하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른바 8월공세(50.8.25~20)와 9월공세(50.8.31-9.15)를 감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함안-창년-왜관-영천-포항 선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북한군은 여기에서 많은 손실을 입게 되고 이에 때한 후속지원이 뒤따르지 못함으로써 9월 중순 경 그들의 전력은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반면에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상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작전의 주도권은 국군 및 유엔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습공격으로 개시된 북한군의 남침공격은 일일 평균 10Km의 속도로 낙동강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곳에서부터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대구마저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이고 말았으며 공격개시 82일 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그들의 기도가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