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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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휴전협상과 교착전 단계, 51.6.23~53.7.27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쌍방은 휴전협정 조인시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데 합의함으로써 휴전회담 기간의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관련하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즉,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의 전투는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제한된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전선은 1951년 8월에 접어들면서 다시 격렬해 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 개성에서는 양측의 대표가 겨우 의사일정에 합의하고 의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사분계선의 설정과 비무장지대의 설치에 관한 내용을 협의 중에 있었다. 유엔군측은 당시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공산군측은 38도선을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공산군측은 회담장소인 비무장지대에 무장병력을 투입하는가 하면 유엔군측이 비무장지대를 폭격하였다고 허위사실을 날조 비방하면서 회담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켜 회담은 8월 23일 중단되고 말았다.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은 휴전 당시의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안을 관철시키기로 하고 휴전회담 개시 당시의 방어선을 개선할 목적으로 제한되 범위의 공격작전을 단행하였다. 10월 말까지 계속된 이 공격은 당시의 대치선에서 평균 10km의 종심지대내에서 치러졌으며, 밀도 높은 전투를 전개함으로써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특히 펀치볼(해안분지) 부근의 전투에서는 쌍방간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공산군측은 피해가 가증되고 전선에서 다소나마 물러나게 되자, 10월 25일 휴전회담에 응하여 유엔군측 안을 수용하였으며,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이전되었다. 그 밖의 의제도 30일 이내에 합의될 것을 전제로 하여 쌍방은 1951년 11월 27일 당시의 접촉선(임진강구-판문점-산명리-금성-송정-신대리-남강)을 잠정군사분계선으로 책정하였다. 이로써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곧 전쟁이 종식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쌍방이 그 후 30일 이내에 합의하기로 한 다른 의제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이미 합의된 잠정군사분계선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1952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선은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여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제한된 국지전 형태의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국군 및 유엔군은 휴전회담이 포로교환 협상의 부진으로 공전을 거듭하다가 결렬 상태에 이르자,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전세를 악화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국지적인 고지쟁탈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공산군도 역시 이러한 전술로 맞섰다.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으로는 불모고지전투, 포크찹 고지전투,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수도고지전투,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단장의 능선전투, 피의능선전투, 펀치볼 전투, 351고지전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전투가 이 기간에 일어났다. 이들 전투는 비록 제한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기는 하나 그 특유의 별칭들이 의미하듯이 지역을 수없이 탈취하고 탈취당하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쌍방간에는 전쟁 초년도의 격동기에 못지않은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사망하자 4월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었으며 6월 8일 포로송환협정이 타결됨으로써 휴전협상의 모든 의제가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10:00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이 날 22:00를 기해 모든 적대행위가 종식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전쟁기간에 국군과 유엔군은 약 115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민간인은 약 100만명이 희생되고 약 1,000만명의 전재민(戰災民)이 발생하였다. 재산 피해는 한국에서만 주택 약 61만 가옥을 포함한 수많은 시설과 재산이 파괴되었다. 공산군측도 165만~200만명의 병력이 손실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국이 38도선 이북지역이었던 철원ㆍ화천ㆍ간성 일대와 서해 5도를 차지하였으나, 옹진반도와 개성-사천 일대를 상실했다. 38도선 일대의 분계선 대신에 임진강 하구-판문점-철원-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선에 남북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