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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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공군의 침공과 유엔군의 재 반격단계, 50. 11.25~51.6.23



중공군은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명분하에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6.25전쟁에 개입하기 위하여 10월 중순부터 압록강을 넘어 북한지역에 진입하기 시작하여 10월 하순까지 제13병단 예하 6개 군 18개 사단이 북한지역으로 잠입하여 적유령산맥 남단 일대에 전개한 후 10월 25일 제1차 공격을 실시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청천강 남쪽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11월 중순에는 제9병단 예하의 12개 사단이 북한지역으로 잠입하여 개마고원 및 장진호 부근에 전개한 후 11월 25일 제2차 공격을 실시하여 유엔군 전선을 동서로 양분시킨 다음 이를 각개 격파할 계획이었다.


이 때 북한군은 재편성중인 제1군단을 서부전선에 제3ㆍ제4ㆍ제5군단을 동부전선에 전개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2군단은 국군 및 유엔군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북한군 제6ㆍ제7ㆍ제8군단은 한만 국경선 일대에서 신편 중에 있었다.

30여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출현으로 일단 공세가 꺾인 국군 및 유엔군은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11월 30일을 고비로 철수가 가속화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후퇴하게 되었으며, 12월말에 이르러서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함으로써 부득이 흥남으로 철수하여 12월 14-24일간에 부산으로 해상철수를 실시했다.


이 때 유엔군은 국군 8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을 38도선 방어를 위하여 배치하였고, 국군 2개 사단과 미군 5개 사단을 평택-원주-심척선에서 운용하기 위하여 예비로 확보하였다. 청천강을 넘어 평양을 점령한 중공군 제13병단은 대부분의 병력을 경의선과 중부의 성천-양덕-곡산-철원 축선으로 투입하여 12월 하순에는 개성-철원 북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제9병단은 장진호-함흥 축선에서 미 제10군단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하였으나, 이 사단과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어 계획대로 진출하지 못하였으며, 그 대신 북한군 제3ㆍ제5군단과 제2전선부대인 제2군단이 동부전선으로 남하하여 38도선 북방에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공산군은 12월 31일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지향시키고, 화천-춘천-원주 축선에 조공을 지향시켜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작전을 개시하였으며, 이 공격을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또는 신정공세(新正攻勢)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38도선을 방어중이던 국군 및 유엔군은 격전을 치르면서 다시 38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이어 7일에는 평택-삼척선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했다.



신정공세로 남침을 계속하여 1월 8일에는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하게 된 중공군도 그 동안에 입은 전력의 손실로 인하여 그 곳에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중공군의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간파한 국군 및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을 기하여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유엔군은 이 지역의 확보보다는 공산군 부대의 격멸에 작전의 주안을 두고 축차적이며 협조된 작전을 전개했다. 국군 및 유엔군이 한강 남안-횡선선에 이르렀을 때 다시 중공군의 반격(제4차 공세: 1951.2.11~18)에 부딪쳐 지평리, 원주일대에서 한 차례의 공방전을 치렀으나 이를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3월 15일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유엔군은 전진을 계속하여 3월 말에는 38도선을 또 다시 회복하였다. 이 때 유엔군은 38도선 방어에 유리한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남애리를 연하는 요지를 점령하고 중부지역에서는 철원-김화로 진격을 계속했다.


이 때 중공군의 다섯 번째의 공세가 되는 춘계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로서 당시 중공군의 가용병력은 4개 병단 16개 군 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이 병력과 북한군을 총 동원하여 4월(4.22~30)과 5월(5.16~22) 두 차례에 걸쳐 공세를 실시했다. 4월에는 서부전선(개성-화천)에 5월에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 전력을 집중시켜 총 공세를 취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도 사력을 다하여 이를 저지하였으며 무제한으로 화력을 운용하며 그들에게 심대한 손실을 입힘으로써 공산군의 공세는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공산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국군 및 유엔군은 곧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5월 말에는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 15일에는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공산군도 그 북쪽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때 유엔군이 공격을 중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이유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유리한 상태에 있었으나 전쟁전의 원상 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공산군이 수세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춘계공세 이래 연 이은 손실로 급격한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공격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전선은 고착화되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심리적인 주도권 쟁탈을 위한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쌍방은 다시 형성된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임진강구-연천-철원-김화-서화-간성)에서 상호 대치하게 되었으며, 전투는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공산군측이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대표를 통하여 휴전을 제기한 것이 계기가 되어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