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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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공군의 침공동기와 규모는?

침공동기

중공은 8년간의 항일투쟁과 4년간의 국공내전을 치른 후에 1949년 10월 1일 중국 대륙에 공산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에서는 월맹, 북한에 이어 세 번째로 공산화가 된 나라이다. 6.25전쟁 당시 중공은 신생국가로서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다.


첫째, 자국의 안보적인 측면에서 한반도에 공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중공정권 수립 후에도 북한과는 이념을 같이하는 국가로서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북한이 한반도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패배할 경우 이념을 달리하는 국가가 한반도를 통일하게 될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자국의 동북방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한 나머지 중공은 북한지역을 지정학적인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둘째, 소련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원조를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중공은 오랜 내전 끝에 수립된 신생국가로서 민생문제의 개선과 대만의 해방이 최우선 정책과제였으므로 자력으로서는 이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전쟁의 참전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는 의도에서 참전하게 되었다.


셋째, 정치적 사회적 면에서 국가의 안정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당시 중공은 공산정부를 수립하기는 하였으나 대만이 미국의 지원하에 본토 수복을 추진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이를 지지 또는 지원하는 반공 및 반 혁명 세력이 잔존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 내부에서도 수 많은 국부군 출신과 이질적인 인적 요소들로 인하여 불평불만이 팽배해지고 있었으며 파벌이 형성되는 등 반란의 소지를 안고 있어 정군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중공은 이와 같은 내부적인 불안정 요인들을 제거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넷째, 중공은 전쟁에 참전하여 패배 일로에 있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원함으로써 당시 동남아 일원에서 움트고 있던 공산주의 활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어 동남아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세계적인 무대에서도 자국의 위치를 부각시켜 대만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억제하는 한편 유엔 대표권의 문제에도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속셈으로 참전을 하게 되었다.


침공규모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할 당시 중공의 지상군은 5개 야전군(野戰軍) 예하에 20-22개 병단(兵團), 71-75개 군(軍), 210-245개 사단(師團)으로 총병력은 2,438,000명으로 추정되었다. 이 중 5개 야전군 예하의 5개 병단 25-27개 군, 75-81개 사단이 항미원조지원군(抗美援朝志願軍)’이란 이름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최초로 6.25전쟁에 투입된 중공군은 제4야전군 예하 제13병단 6개 군 18개 사단으로서 이들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도하하였고 총병력은 180,000명이었다. 두 번째는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3개 군 12개 사단 약 120,000명이 11월 초순에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이때는 한국군 및 유엔군이 청천강-풍산-길주까지 북진하여 있을 때였다.

세 번째는 1951년 2월-3월에 제2야전군 예하 제3병단 3개 군 9개 사단과 제1야전군 예하 제19병단 3개 군 9개 사단, 그리고 제13병단 제47군 3개 사단 등 모두 21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이 때는 한국군 및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하였다가 재(再) 반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였다.

네 번째는 1951년 6월에 제20병단 2개 군 6개 사단과 제13병단의 1개 군 3개 사단 등 9개 사단이 입한(入韓)하였으며, 최초로 입한한 제13병단의 1개 군(제66군)은 복귀하였다. 이때는 한국군 및 유엔군이 재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문산-철원-김화-간성을 연하는 선에서 상호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다섯 번째는 1952년 9월부터 1953년 1월간에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4개 군 12개 사단, 제20병단 1개 군 3개 사단, 그리고 제13병단 1개 군 3개 사단 등 18개 사단이 입북(入北)하였고, 최초로 들어온 제13병단의 1개 군(제42군)과 두 번째로 들어온 제9병단 3개 군(제20ㆍ제26ㆍ제27군)이 철수하였다. 이때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으며 쌍방은 상호 대진 상태 하에서 고지쟁탈전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1953년 1월에 입한(入韓)을 끝으로 중공군은 더 이상 북한지역에 병력을 증강시키지 않았다. 그 밖에 휴전 이후 교체기에 들어온 1개 군까지 합하여 6.25전쟁 기간 중 북한지역으로 이동된 중공군의 총규모는 25-27개 군에 75-81개 사단으로 병력수는 약 100만 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