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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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공군이 실시한 7차례 공세 목적과 규모는?

중공군은 6.25전쟁에 개입한 이후 7차에 걸쳐 대공세를 취하였다. 제1ㆍ2차 공세는 1950년 말에 실시되었고, 제3ㆍ4ㆍ5ㆍ6차 공세는 1951년 상반기에 이루어졌다. 마지막 제7차 공세는 1953년 7월에 실시되었다.

제1차공세는 국군 및 유엔군이 북진을 단행하여 서부전선에서는 청천강을 도하하고 동부전선에서는 함흥 및 흥남을 점령한 다음 장진호와 청진 방향으로 총공세를 펴고 있던 1950년 10월 25일 실시되었다. 중공군은 이 때 제1차로 압록강을 도하한 제13병단 6개군 중 5개 군을 적유령산맥 남단에 전개시키고 1개군을 장진호 북쪽에 전개시켜 동부에서는 국군 및 유엔군의 전진을 저지 및 견제하였으며, 서부에서는 운산-희천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국군 및 유엔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격퇴시켰다.


제2차공세는 제1차 공세를 취한지 한달이 지난 1950년 11월 25일에 실시되었다. 이 날은 국군 및 유엔군이 제1차공세 후 소강상태가 지속되는 시기를 이용하여 서부전선에 1개 군단을 증강시키고 동부전선에 계획대로 1개 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전선의 전력을 증강하여 중공군의 조직적인 공격이 실시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지으련,s 계획하에 한만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이른바 크리스마스 총공세를 취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중공군은 제1차로 북한에 진입한 제13병단 18개 사단이 적유령산맥 남단 지역 일대에서 제2차로 입한한 제9병단 12개 사단이 장진호 및 개마고원 일원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국군 및 유엔군을 동서로 양분하여 서부에서는 청천강 선에서 동부에서는 장진호-함흥 선에서 포위하여 격멸한 다음 남진할 계획하에 대공세를 취했다.


제3차공세는 국군 및 유엔군이 38도선 부근으로 철수하여 임진강 하구-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인 1950년 12월 31일에 실시되었다. 이 공세는 1951년 1월 1일을 전후하여 실시되었다는 뜻에서 일명 신정공세라고 불렀다.

중공군의 신정공세는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도착한 제13병단 6개 군과 그동안 전투력이 회복된 북한군에 의하여 감행됐다. 제9병단은 제2차 공세시 국군 및 유엔군에게 입은 심한 손실로 인하여 함흥 부근에서 재편성 중에 있었다. 중공군은 최초 북한군의 남침경로와 유사한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화천-춘천-홍천-축선에 조공을 지향하여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 때 중공군은 개성-화천지역에서, 북한군은 화천 이동 지역에서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 공세로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재차 서울에서 철수하여 평택-제천-삼척 선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 선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공군은 10월 공세 이후 계속된 공격에서 입은 손실과 신장된 병참선으로 보급이 뒤따르지 못하여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제4차공세는 국군 및 유엔군이 1951년 1월 25일 재반격작전을 단행하여 김포-한강 남안-남한산-양평-지평리-횡성-하진부리 선까지 진출한 다음,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유선 중부전선의 홍천 공격에 중점을 두고 작전을 진행중이던 2월 11일에 개시되었다.

이 때 중공군은 일부 군으로 하여금 한강을 이용하여 서울을 방어하게 하면서 주력을 중부전선 홍천 부근으로 이동시켜 북한군과 합세하여 지평리, 원주 방향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취하였다. 이러한 2월 공세에 투입된 중공군의 전력은 신정공세시와 같은 규모로 강력한 것이었으며 게다가 신정공세시에는 광정면에 걸쳐 공세를 취하였지만 2월 공세시에는 한 지점으로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 공세로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 양평-원주-제천-평창에 이르는 대 돌파구를 형성할 수 있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과 조직적인 저항으로 2월 18일경에는 그 공세가 꺾이었으며, 국군 및 유엔군은 다시 반격작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제5ㆍ6차공세는 유엔군이 재반격 작전을 계속하여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재차 회복한여 임진강-영평천-화천 저수지-남애리를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철원-김화지역으로 공격을 계속중이던 1951년 4월 22일에 개시되었다. 이 공세는 봄에 실시되었다고 하여 춘계공세라고도 불리었다.


중공군의 제5ㆍ6차 공세는 중공군이 취한 공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대가 동원된 공세이다, 이 때 투입된 부대는 제4차 공세까지 참여한 제13병단 6개 군, 제2차 공세후 장진호 부근에서 재편성을 실시한 제9병단 3개 군, 그리고 1951년 초 제3차로 진입한 제3병단 3개 군과 제19병단 3개 군 그리고 제13병단 1개 군 등 총 4개 병단 16개 군 약 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이 부대들을 서부와 동부에 각각 1개 공격집단씩으로 편성하여 제5차 공세인 4월(4.22-30)에는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시켜 대공세를 전개하여 서울 북방 구파발-홍천 선까지 진출하였다. 제6차 공세인 5월(5.16-22)에는 동부전선에 주력을 집중시켜 또 한 차례의 대공세를 전개하여 홍천-하진부리-강릉에 이르는 대 돌파구를 형성하였다.

이들 공세로 중공군은 다시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공산군의 군사적 우위를 과시하며 유엔군의 전쟁의지를 포기하도록 한다는 데 목적을 둔 것이며, 만약 이러한 1차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시에 진행되고 있던 휴전협상에 유리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하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서울은 반드시 고수한다는 국군 및 유엔군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그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른 채 서울 북방에서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이후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6월 중순에는 38도선을 세 번째로 확보하고 임진강구-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을 연하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도 그 북방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제7차공세는 1953년 7월 중공군은 휴전을 코앞에 두고 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고 있는 금성지역에 1951년 춘계공세 이후 최대의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보복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후의 공세를 감행해 점령지역을 최대한 확대함으로써 그들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한국정부의 북진통일 주장과 휴전반대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한국군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이에 중공군은 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고 있는 화천 북방의 금성 돌출지역을 선정해 집중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이 금성지역을 공격목표로 선정한 것은 한국군 담당지역 중에서 지형이 험준해 기갑 및 화력지원이 취약하고, 북쪽으로 돌출돼 있어 작전이 비교적 쉬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