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거제도 포로명단 DB 구축경위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국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 입수한 거제도포로 17만여명의명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을 시행·완료하였습니다.

민족의 비극과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한 민족의 뼈아픈 역사를 되새겨보고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후세에 좋은 교훈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 당시 유엔군이 작성한 문서이기때문에 모든 명단은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고 한글표기를 영문으로 대체하다 보니 표현이 다소 미비한 점도 있으니 많은 양해 바랍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배경

[거제도 포로수용소] 거제시 발간자료에서 발췌한것임.

1. 수용소 설치배경

일찍이 포로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을 수용 관리하는 문제가 어려워질 조짐이 보였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그 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포로를 분산시켜야 할 필요성과 공산포로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된 대책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으로 포로를 옮겨 놓는 방법이었다. 이때 유엔군사령부가 수용소 후보지로 생각한 섬이 제주도였다. 유엔군사령관은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장군에게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제주도가 포로수용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표시하였다.

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이다

[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이다]

제8군사령관이 제주도를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했던 이유는 ①제주도가 이미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되어 있다는 점, ② 사용할 물이 부족하다는 점, ③ 오랫동안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다는 점, ④ 피난한 한국 정부가 이섬을 임시정부의 이전 장소로써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제주도에는 25만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여기에 포로와 수용소 경비 및 운영에 필요한 병력 등을 더하게 되면 그 인구가 2배로 늘어나게 될것이었다. 이 섬이 그런 인구 증가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요되리라 판단되었다.
그러나 1950년 말에 중공군의 반격을 받아 사태가 극도로 불리해지면서 아군이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해서 후퇴하게 되자, 이번에는 리지웨이장군이 태도를 바꾸어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1951년 1월 11일의 일이었다. 제8군사령관이 찬성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는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할 권한을 그에게 부여했다.
그런데 포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문제가 거의 매듭지워질 순간에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후보지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결국 이섬이 포로수용소 이전 장소로 최종 결정되었다. 거제도가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섬이라는 조건과 육지로부터의 이동거리등이 고려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적합지역으로 판단한 이유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2년 6월 9일에 열린 미 하원의 청문회였다. 이 청문회는 포로수용소장 돗드장군의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거제도 포로수용문제 전반에 걸친 사실 확인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육군성장관(Secretary of the Army)페이스(Hon.Frank Pace,Jr.)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Gen.J.Lawton Collins, Chief of Staff, United States Army) 이었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장소로 선택한 주요 이유라고 두사람이 밝힌 내용은

① 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② 급수가 용이하다
③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급수문제는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되었는데, 근해에 있는 여러 섬 중에서 거제도 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공급이 가능한 섬을 찾기 어려웠다. 제주도에는 이미 많은 피난민이 들어차 있는데다가 그들이 사용할 물도 충분치 않아서 우물을 더 파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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