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1965년 10월 20일, 당시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Saigon, 현호치민市)에 141명의 합동군 참모 기능으로 편성하여 연합 및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중대전술기지 개념으로 작전 성과 를 극대화시켰으며, 군물자 조달, 민간인 지원 문제 등 해외 파병부대 통합사령부로서 다원화된 임무와 기능을 수행했다.
베트남전쟁 파병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부에 있었는데, 주월한국군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벗어나 대통령의 통수권 행사 및 국방장관의 지휘·감독권이 직접 미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중대전술기지 개념으로 작전 성과를 극대화시키는데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다. 그리고 작전 지휘 및 통제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조달, 민간인 지원 문제 등 해외 파병부대 통합사령부로서 다원화된 임무와 기능을 수행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1965년 10월 20일, 당시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Saigon, 현 호치민市)에 141명의 합동군 참모 기능으로 편성하여 연합 및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다음해 1966년 8월 15일, 원활한 작전 통제를 위해 냐짱에 야전사령부를 창설했다. 즉 제9사단의 증파에 따라 효과적인 작전 통제와 제100군수 사령부에 대한 협조가 필요했다. 제9사단의 배치와 운용에 관해서 미군과 견해차가 컸으나 1번 도로를 연하여 해안선 지역을 따라 전략적 핵심 지역 배치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야전사령관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겸임을 하고 행정 부사령관은 사이공에서, 작전부사령관은 냐쨩 현지에서 참모 요원을 구성하여 예하부대 작전 통제를 위한 전방 지휘소 역할을 했다. 당시 냐짱에는 미 제1야전군사령부가 있어 월 1회 개최된 한,미,남베트남군과의 연합작전회의와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았던 공중 및 해상작전 지원 등은 연합작전 능력을 배양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973년 3월 23일 남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파병된 연병력 324,864명을 지휘하는 남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최고사령부였다.
기간 중 한국군은 577,487회의 대,소규모 작전을 통해 한국군 전술책임지역 7,000㎢를 평정하고, 남베트남 난민 120만 여명의 거주를 지원했으며, 태권도 보급과 대민 지원활동을 통하여 양국의 선린 우호관계를 증진시켰다.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작전 지휘 및 통제 경험은 철수 후 1973년 7월 1일부로 제3군사령부 창설의 원동력이 되었다. 즉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책임진다는 닉슨독트린의 영향으로 1971년 3월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에 따른 서부전선지역의 방어상 공백과 한·미 제1군단의 임무 종결에 대비한 지휘체제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주월한국군사령부를 모체로 한 새로운 군사령부 창설 계획에 의거, 예하의 수도사단 및 제9사단을 비롯한 부대들이 존속됐고 초대사령관에는 이세호 중장이 임명됐다. 이처럼 주월 한국군은 철수 후에도 실전 경험을 갖춘 병력과 휴대해 온 신형 장비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군 현대화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과의 안보협력 파트너십이 더욱 공고해 지고 연합 방위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월 한국군사령부(당시)
▼ 주월 한국군의 편성표
▼ 주월한국군군사령부 본부 편성표2
66. 6월 증편 : 감찰부, 원호부, 정훈부, 의무부, 부관부
67.3-9월 증편 : 군종부, 민사심리전처, 전부발전부, 공병부, 군사정보대(증파)
68.1월-70.2월 증편 : 기획처(68.1월), 병기부(69.12월), 병참부·수송부(70.2월)
인사처 : 헌병부, 부관부, 의무부, 군종부, 원호부 협조
작전처 : 전발부, 정훈부 협조, 군수처 : 공병부 협조
▼ 야전사령부 편성표3
예속 : 본부근무대
배속 : 보병 수도사단, 보병 제9사단, 군사정보대(-), 통신보안대(-), 민사심리전 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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