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거제도 포로명단 DB 구축경위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국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 입수한 거제도포로 17만여명의명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을 시행·완료하였습니다.

민족의 비극과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한 민족의 뼈아픈 역사를 되새겨보고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후세에 좋은 교훈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 당시 유엔군이 작성한 문서이기때문에 모든 명단은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고 한글표기를 영문으로 대체하다 보니 표현이 다소 미비한 점도 있으니 많은 양해 바랍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배경

[거제도 포로수용소] 거제시 발간자료에서 발췌한것임.

가. 포로 관리의 성격

6 ·25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북한 및 중공군 포로에 대한 한국군 및 유엔군측의 관리 및 대우의 실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수용소의 위치도 공개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백색 또는 황색으로 PW표지가 되어 있어서 수용소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가 이표지를 관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산군측의 포로 관리의 실상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현상이엇다.

유엔군 관할하의 모든 포로수용소들은 1949년 제네바협약의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으며, 그 실태가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에 의해 수시로 점검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방 언론들에 의해 언제든지 확인이 되고 지상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전시라고 하는 악조건하에서도 유엔군측이 국제법 및 관례를 따라 포로를 관리하려고 노력한것은분명했다.

수용소의 질서는 포로자치제에 맡겨져 있었으므로 유엔군 수용소는 낙원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생각해볼 수 도 없었던 숙사에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하는 일이라고는 형식적인 작업이 고작이었다.
전장에서처럼 죽이고 죽는 전투도 없고, 발이 부르트도록 강행군을 하는 일도 없었으며 잠을 못자면서 경계근무를 설 필요도 없었다. 경비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든든하게 맡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겨울 추위가 와도 동상에 걸릴 염려가 없었다.

포로수용소내에서의 포로들의 일과는 통상 다음과 같았다.

  • - 오전5시30분 기상과 동시에 아침식사
  • - 오전6시30분 전원집합 점호
  • - 오전7시 오전 일과 시작
  • - 오전11시30분 점심식사
  • - 오후1시 작업 인원 집합, 오후 일과
  • - 오후4시 일과 종료
  • - 오후5시 저녁식사
  • - 오후8시 점호후 취침

아침 기상과 동시 배식을 받고 있는 포로들

[아침 기상과 동시 배식을 받고 있는 포로들.]

저녁 식사 후 취침 점호 전까지는 자유시간으로서 각종 운동, 독서, 목욕,세탁등을 할 수 있었다. 모든 포로들은 포로가 된 이후 계속 체중이 늘어나고 잇었으며, 그들의 사망률은 유엔군 전투 부대원이 한국의 풍토병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숫자보다 오히려 낮았다.

야외목욕:야외에 놓인 드럼통 물을 이용, 공산군 포로들이 몸을 씻고 있다.

[야외목욕:야외에 놓인 드럼통 물을 이용, 공산군 포로들이 몸을 씻고 있다.]

요컨대 유엔군 관할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공산포로들은 철조망속에서도 억류된 사람의 분수에 넘치는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자리들끼리 피를 부르는 싸움을 하지 않는 한.

나. 급식 및 피복

6 ·25전쟁 첫해 동안 유엔군은 벙참상의 문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전쟁 초반부터 수용능력을 넘는 포로를 보호 관리해야 하는 일은 대단히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 하는, 전적으로 의존적인 포로집단의 존재는 그렇잖아도 압박을 받고 있는 유엔군의 병참문제에 더 큰 압박 요소가 되었다. 유엔군의 병참 물자의 조달,보급은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곧 미군이 고충이 되었던 것이다.

유엔군 산하의 포로수용소를 관장하고 있던 미군 당국은 제네바 협약을 최대한 준수하려 하였으며, 또한 국제접십자사 등의 확인을 받고 있었으므로 포로들의 관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53년 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매일 94톤의 쌀 및 다른 곡물이 소비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생산감소에 의해서 쌀 정량이 감소되어도 쌀 대신에 다른 곡물이 보충되어서 식량의 전체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여기에 추가하여 많은 양의 노루고기, 소고기국, 돼지국, 소금에 절인 쇠고기, 육고기와 야채류, 마른계란이 지급되었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 포로들 중에서 요리사를 뽑아서 썼다. 그들은 또한 신선한 채소와 깡통에 든 채소, 말린 콩과 완두콩, 후추,간장,소금, 1일 10개피의 일제 담배가 든 레이션을 지급받았다.

수많은 포로들의 급식을 위한 취사장

[수많은 포로들의 급식을 위한 취사장]

거제도 수용소 안에서는 공산 포로들에게 의복이나 일체의 공급품으로는 미제(美製)가 공급되었다. 먹는것도 한국군의 수준에 따랐으나, 미제 레이션 등이 추가 지급되어 한국군보다 오히려 포로들이 더 잘먹는다는 불평을 들었다. `자유`라는 담배가 특별 제조되어 이들에게 공급되었는데 국군용 `화랑`담배보다 맛이나 질이 훨씬 좋았다. 대다수의 북한군 및 중공군 포로들은 일상 생활에서 그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훌륭한 식사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포로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이렇게 어렵사리 수용소에서 미국 음식을 먹여서 원기를 회복시켜 놓은 포로들이 연출하는 기상천외한 장면들을 목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줄 어렴풋이 알고도 달리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던것이 그들의 속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 작업 및 교육

유엔군사령부는 포로 처리의 방침을 그들의 노동력 활용과 심리전에 두었다. 노동이 가능한 포로들은 여러 종류의 작업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자기들이 쓸 물자의 운반과 도로보수, 환경 작업등 경노동에 속했다. 그 외에 수용소 내의 고정작업으로 환자 간호, 취사, 목공일,청소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과 속에 교양 강좌와 1인 1기의 실기 교육이 포함되어 희망에 따라 참석하도록 하였다.

장교, 환자 그리고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작업에서 제외되었다.

포로들 중에서 숙련되었거나 또는 반쯤 숙련된 기술자들은 제36공병단 감독하에 수용소 내에서 자신들의 생활 여건을 좋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포로수용소 내에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물건들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었다.

포로에 대한 교육은 유엔군사령부의 민간정보교육국(民間情報敎育局 Civil Information & Education Section)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포로교육은 거제도수용소의 체제가 잡히기 시작한 1951년 6월에 반공적 성향이 강한 제63막사에서부터 시범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시행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다른 수용소로 점차 확대되었다. 교육방법은 미군장교가 민간이 교사들에게 교육 개요를 소개하고 실제교육은 이들 민간인 강사들이 담당했다.

직업교육훈련인 양복장이 기술교육을 받고 있는 포로

[직업교육훈련인 양복장이 기술교육을 받고 있는 포로]

포로교육의 주요 목표는 그들에게 기술을 훈련시키는 외에도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사실을 가르쳐서 민주주의를 주입시키는데에 있었다. 이러한 목표가 구체화된 교육 프로그램이 공식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그 내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쟁 발발 과정, 유엔의 목적 기능 실절, 전체주의에 대비한 민주주의의 원리 이상 관행, 자유 세계 여러나라의 발전상, 한국과 중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제등이었다. 그 저변에는 자유 체제의 우월성과 전체주의의 문제점이 제시되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교육 이수 후의 평가에서도 반공적인 요소는 여실히 드러났다.

교육의 분야에는 오리엔테이션 외에도 문자해득 수업, 직업훈련, 보건 위생 및 여가활동등이 있었다. 문자해득 수업은 포로의 상당수가 문맹인 까닭에 다른 교육의 목표를 위해서도 강조되었는데, 포로들도 이를 유용하게 여겨서 수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교육 효과도 가장 커서 오랫동안 실시되었다. 직업훈련으로는 대장장이, 목수, 이발사, 구두수선, 양복장이 등의 기술교육이 이루어졌다. 1952년초부터는 농업교육이 실시되어 2만명 이상이 등록하기도 하였다.

대장장이 교육훈련중인 포로, 그러나 이곳은 폭동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기도 하였다

[대장장이 교육훈련중인 포로, 그러나 이곳은 폭동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라디오 방송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공식 오리엔테이션, 문자해득수업, 직업훈련, 보건위생 및 여가활동등의 다른분야 교육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다.

영화는 매월 20-30편씩 상영되어 4-5만명이 관람했으므로 그 효과는 상당하였다. 라디오 방송은 영화보다 더 많은 사람, 특히 문자해득력이 낮은 사람에게도 전달이 용이하여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초기에 단지 뉴스와 음악이 방송되었지만, 점차 방송수신장비를 갖추어 1951년 말에는 주당 21시간의 한국어 방송과 7시간의 중국어 방송이 가능해졌다.

포로의 분산 작전을 전후하여 교육의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1952년 3월 말 모든 공개적인 반공적 선전교재와 교육과정은 폐지되었다. 교재와 그 내용이 소위 `긍정적 접근`방법으로 바뀌었다. 포로들에게 민주 사회의 삶의 가치는 교육되었지만, 공산주의의 오류와 약점에 대한 언급은 피하도록 했다.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송환거부 포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 직업훈련과 석방 후 생활에 적응할 능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들 위해 초 중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여가시간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신체단련과 여가활동, 지적활동을 하게 하였다. 또한 포로에게 민주적 생활 방식에 익숙케 하고, 유엔과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태도를 갖도록 교육에 친민주적 반공적 내용을 포함시켰다.

민간정보 교육국 주관으로 실시되는 문맹자를 제외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수업광경

[민간정보 교육국 주관으로 실시되는 문맹자를 제외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수업광경]

본국으로의 송환희망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자립 능력을 함양하고, 불안을 최소화하여 질서와 규율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문자습득, 농업, 건강 및 위생등에 대한 강의와 운동 및 여가활용, 도서와 정기간행물 등을 제공하였다.

이런 교육에 대해서 포로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수용소 당국은 잠재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내포한 포로들에게 공산측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민주주의를 인식시키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포로들은 교육 프로그램이 그들의 마음을 친공에서 반공으로 바꾸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특히 오리엔테이션 교육은 좌익포로들의 사상을 약화시키면서,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포로들에게 공산측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반공 진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데에 기여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의 교육에 대한 포로들의 저항과 공산군측의 대응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의 저항에 의해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이 무시되거나 교육이 실시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수업이나 시험에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지 않거나 수업 내용을 비판하는 것으로 저항을 표시하였다. 또 라디오 방송용 유선과 스피커 장비를 파괴하거나 숨기기도 했다. 이러한 좌익포로의 저항에는 `해방동맹`이라는 조선노동당 거제지부의 뒷받침이 있었다.

포로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인은 포로들의 장래 지위가 확정되지 않아서 수용소 내의 동요가 늘 존재한 것이었다. 좌익 포로들로서는 공개적으로 협조하거나 반공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 자신들의 입장에 치명적임을 알고 있었다.

방송요원들 방송내용을 협의하고 있다. 주당 한국어 방송을 21시간, 중국어방송을 7시간정도 하였다

[방송요원들 방송내용을 협의하고 있다. 주당 한국어 방송을 21시간, 중국어방송을 7시간정도 하였다.]

좌익포로들의 동요와 방해활동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측은 치공막사에서 질서를 회복하는데는 교육 프로그램의 순조로운 재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수용소 당국은 교육의 진행을 위해서 좌익포로를 다른 막사로 전출시켜 교육에 대한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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