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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07: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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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⑩ 대한해협해전
[해군 첫 전투함, 북한군 게릴라 600명 수장시켜]

6·25 전쟁 발발 2개월을 앞두고 대한민국 해군은 해군 전 장병과 국민의 성금으로 전투함을 구입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이자 현대식 장비와 무장을 갖춘 PC-701함은 4월 10일 진해에 입항한 후 국내의 주요 항구를 순방하면서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고 6월 24일 진해항으로 귀항했다.

■ PC-701함의 출동

오랜 기간의 순항을 마친 701함의 승무원들은 주말을 맞아 대부분이 외출을 실시하고 있었다. 다음날인 6월 25일 오전 10시쯤 통제부사령장관 김성삼 대령은 정박 중인 701함을 방문해 당직사관 김종식 소위에게 다음과 같은 해군본부의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진해통제부사령장관은 701함을 기함으로 예속 함정 2척을 동해에 급파하라. 701함장은 통제부사령장관으로부터 YMS-512정과 518정을 인수 지휘해 즉시 동해안으로 출동, 제2정대사령과 협력해 해상경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적을 포착하는 대로 격침하라.” 사령장관은 이 작명을 토대로 직접 701함의 출동준비를 지휘했다. 12시에 모든 출동태세를 완료한 701함장 최용남 중령은 통제부사령장관에게 출항준비 완료를 보고하고 사령장관으로부터 상세한 작전상의 주의사항을 지시받았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3시 마침내 701함은 YMS-512정을 지휘해 진해항을 출항했다. 그리고 518정에 대해서는 보급물자 적재가 완료되는 즉시 출항하도록 지시하고 512정과 종렬진을 형성해 동해로 항진했다.

■ 북한 수송선 발견

해전 경험도 없이 훈련에만 주력했던 701함 대원들은 오후 6시 30분 부산앞 오륙도 등대를 좌현정횡 2㎞로 보면서 침로 045도로 북상했다. 오후 7시 30분에 1차 변침을 통해 028도로 북상하던 701함은 오후 8시 12분에 방위 045도, 거리 약 7㎞ 되는 수평선상에서 피어나는 검은 연기를 목격했다. 701함은 즉시 변침해 최대속도로 접근하면서 후속하는 512정에 급속도로 북상하도록 지시했다. 이 무렵 보급품 적재를 완료한 518정은 7㎞ 후방에서 북상하고 있었다.

701함장 최용남 중령은 최대의 속도로 정체불명의 선박에 접근하도록 명령했다. 수평선상의 검은 연기에 다가가자 괴선박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함장은 전투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괴선박은 국적과 선명도 표시하지 않은 채 침로 180도, 속도 10노트로 남하하고 있었다. 오후 9시 30분 701함은 북위 33도 15분, 동경 129도 31분의 위치에 도달해 공해상을 항해하고 있는 괴선박의 선체를 완전히 볼 수 있게 됐다. 701함은 괴선박을 방위 110도, 거리 3㎞로 유지하고 남하하면서 국기를 게양할 것과 국적을 제시할 것, 그리고 출항지와 출항시간 및 목적항을 제시할 것을 국제발광신호로 요구했다. 그러나 30분에 걸쳐 계속된 요구에도 괴선박은 응답이 없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적성국의 선박임을 의심한 701함장은 재확인을 위해 접근하면서 정지명령을 수차에 걸쳐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적선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701함은 15노트의 속도로 적선에 접근해 신호등으로 조명을 시작했다. 국기와 선명도 표시되지 않은 선박의 갑판 뒤쪽에는 중기관총 2정과 수병복을 착용한 수많은 무장 세력이 승선해 있었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북한 정규해군 및 육전대의 복장으로 인해 북한의 선박임을 재확신한 701함장은 즉각 적선으로부터 이탈해 “확인된 선박은 북한의 1000톤급 수송함정이며, 약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남하 중에 있음.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해군본부에 타전 보고했다.

■ 대한해협 해전과 북한 수송선 격침

명령을 기다리던 701함에 해군본부의 적선을 나포하라는 회신이 접수됐다. 그러나 공해상에서 항해 중인 선박을 나포하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선을 영해 안으로 유도하는 작전을 실시해 약 6㎞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더 이상의 유도가 불가능해지자 701함은 다시 해군본부에 상황을 타전 보고했다. 약 3분 후 해군본부는 회신을 통해 적선 격침임무를 701함에 하달했고, 모든 승조원은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적선을 최초로 발견할 당시의 해상상태는 옅은 안개로 인해 시정거리는 2~3km에 불과했고, 전투에 돌입할 무렵에는 지속적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적선의 정확한 위치 확인에 어려움이 있었다. 6월 26일 0시 30분에 701함은 북위 34도 56분, 동경 129동 30분의 위치에 적선 좌현 3㎞의 거리를 두고 3인치 주포로 사격을 개시했다. 포술장 유용림 중위의 사격개시 명령과 함께 주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함의 돛대를 통과해 좌현해상에 떨어져 물기둥이 치솟았다. 갑작스러운 포격을 받은 적함은 급선회를 시작했고, 701함은 1㎞까지 접근해 함포사격을 계속했다. 후속하던 YMS-518정도 701함의 좌현 후미 1㎞ 위치에서 37㎜포로 사격을 개시하자 적함은 57㎜포와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 등으로 대항해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다.

계속되는 701함의 포격 속에 명중탄을 얻어맞았으나 적함은 남하를 기도했다. 701함의 포탄은 마침내 적함의 중앙하부에 명중했고, 적함은 좌현 난간이 해면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기관실의 보일러 폭발음과 함께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적함은 기울어져 가고 침수로 인해 흘수는 낮아져 갔다. 그러나 이때 35발의 포탄을 쏘아댄 701함의 3인치 주포가 고장을 일으켰다. 격발장치의 고장으로 사격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를 알아차린 적함은 최후의 반격을 시도했다. 적함과는 약 1000m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적함은 침몰돼 가는 와중에도 발악적으로 접근해 400m까지 다가왔다. 적탄이 701함의 선체에 집중되는 순간 적함의 후갑판에 장치된 포가 701함의 조타실 중앙하부를 포격했다.

조타수 김창학 삼등병조는 파편상을 입은 채 끝까지 키를 잡고 있었으며, 주포 전화수 김춘배 삼등병조 역시 다리 관통상을 입고도 전화기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김종식 소위도 적탄의 파편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열한 포격전이 끝날 무렵 적함은 침몰돼 갔으며, 6월 26일 밤 1시 25분 완전 침몰과 함께 승선하고 있던 600여 명의 무장 병력도 수장됐다.

■ 대한해협 해전의 의의

701함의 대한해협 해전의 승전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던 부산항의 안전을 확보한 전략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부산은 군수물자와 증원병력이 남한으로 들어올 수 있는 주요 항구였으며, 따라서 북한 무장 게릴라 600여 명이 부산항을 점령했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대한해협 해전을 비롯한 동해안의 해전에서 예상치 못한 실패에 직면한 북한해군은 더 이상 그들의 작전방침인 무장 게릴라 병력의 상륙지원을 실시하지 못하고 서해안에 산재한 도서지역 침투로 작전계획을 선회했다. 이 전투에서 701함은 1000톤급의 적 수송선을 격침시키는 한편 그 선박에 승선하고 있던 무장 게릴라 병력 600여 명을 수장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에 701함은 적의 포격으로 조타실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2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명이 부상을 입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최권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6·25전쟁과 해군·해병대의 활약-한국 해군 단독 통영상륙작전 `귀신잡는 해병대' 세계가 찬사25전쟁 이전 한국 해군은 총 37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전투함은 PC-701 백두산함 1척이었고, 해군 병력은 7790명이었다. 6?25전쟁 기간 중에 호위함(PF) 등 30척의 다양한 유형의 함정을 보강해 옥계해전과 대한해협해전, 해상봉쇄작전, 해상수송작전,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소해작전과 전략도서 확보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 해상봉쇄작전

6?25전쟁 발발로 미국은 1950년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해 6월 28일부터 한국해군과 유엔해군은 한반도 해역에 대한 즉각적인 해상봉쇄작전을 실시하게 됐다.

해상작전구역은 유엔해군은 동?서해상 37도 이북을 담당하고, 한국해군은 37도 이남을 담당했다. 특히 해군은 주로 유엔해군 대형함이 작전하기 어려운 연안에서 작전을 했다.

한국해군은 전쟁 발발부터 1950년 10월 말까지 하루 평균 21척의 함정을 출동시켜 단독작전은 물론 유엔해군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해상봉쇄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동,서,남해안에서 전쟁기간 수행된 봉쇄작전으로 한반도 전 해역에 대한 해상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국해군과 유엔해군의 월등한 함정으로 괴멸된 북한해군은 수세적인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상륙작전

주요 해군작전 중에서 한국해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통영상륙작전은 해군과 해병대의 위용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산 교두보의 측방지역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제거해 우리 국군장병들에게 승리의 신념을 심어 줬을 뿐만 아니라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말은 한국 해병대의 영원한 별명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인천상륙작전 시에는 한국해군은 초계함 4척과 소해정 11척 등 총 15척을 참가시켜 상륙작전 시에 함포지원과 소해작전을 지원했으며, 특히 9월 11일 PC-703함은 인천해상에서 초계하던 중 기뢰를 부설하고 있는 적의 소형선박을 격침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해병대는 미 5해병연대와 함께 돌격상륙해 인천 시가지를 조기 점령하고 확보했으며, 서울탈환 시에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 소해작전

동,서해안에 소해작전 임무를 수행하면서 부설된 기뢰에 접촉돼 총 4척의 함정의 손실이 있었지만, 원산·진남포·인천·목포·여수·장전 등 한반도 전 해역에서 소해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소해장비나 소해기술을 체계적으로 보유하지 못해 소해조직을 신설해 미 해군에서 소해장비 설치와 소해전술을 습득한 후 본격적인 소해작전에 투입하기도 했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는 한국해군 소해함의 출동 횟수만 해도 3400회 넘게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유엔해군과 긴밀하게 협조해 기뢰부설 전 구역에 대한 소해작업을 전개했다.

■ 전략도서 확보 작전

동해안에서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원산항의 해상봉쇄를 실시해 적으로 하여금 원산항 방어를 위한 병력의 분산을 강요하고, 해안에 인접한 적의 육상 병참선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또한 아군의 정보 수집과 유격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이 지역에 출격하는 우군 항공기나 조종사의 탐색 및 구조작전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한국해군은 1951년 2월부터 영흥만에 위치한 여도작전을 시작으로 신도·황토도·양도 등을 상륙해 탈환하고 도서방어작전을 실시했다.

한편 서해안에서는 아군의 해군작전을 보다 원활하게 하고 내륙에서 활약하는 청년의용군의 유격활동을 지원하며 도서를 거점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도서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1951년 4월, 서울의 관문인 인천 서측지역에 위치한 교동도 확보작전을 시작으로 백령도·석도 등을 확보했다. 이러한 전략도서 확보작전으로 강화도에 침입하고 김포반도를 거쳐 인천을 위협할 수 있는 적의 기도를 사전에 차단했던 것이다. 북한군은 배후도서를 점령 확보하고 도서를 탈취하고자 호시탐탐 기습의 기회를 노리며 여러 차례 기습 공격을 해왔지만, 한국 해병대는 소수의 방어병력으로 적의 공격을 번번이 격퇴해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하고 도서방어작전의 귀감을 보여 줬다.

■ 해상수송작전

개전 초기 한국 해군은 옹진반도에서 위기에 처한 육군 제17연대를 안전하게 인천으로 철수시켜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한국해군의 구출작전이 없었다면 제17연대는 북한군의 막강한 화력에 전멸하는 불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제17연대는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지 채 3개월이 되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육군대표로 참전해 서울탈환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한편 1950년 8월 북한군에 측면을 돌파당한 한국 육군 제3사단이 포항 북쪽 10마일에 위치한 청하에서 전멸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 발생했다. 상륙함(LST) 3척과 유엔군 항공기의 근접항공지원으로 한국사단 병력 5800명, 한국군사고문단 연락단 인원과 1200명의 민간 피난민을 안전하게 해상철수시켰다.

<최권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참전 노병이 말하는 대한해협해전-포탄 아끼려 코앞까지 접근해 조준사격 `백발백중']

1950년 6월 나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사 온 백두산함이 자랑스럽고 또 생전 처음 군함을 갖게 된 기쁜 마음으로 부산ㆍ묵호ㆍ여수ㆍ목포ㆍ제주ㆍ군산ㆍ인천 등지를 돌며 훈련도 하면서 해군을 선양하고 있었다. 그렇게 출동을 마치고 6월 24일 밤 12시가 다 돼서 진해에 귀항했는데 다음날 오전 해군본부로부터 북한 무장병력이 배를 타고 동해안에 상륙했는데 빨리 출동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비상소집으로 외출 장병을 모두 불러들여 오후 3시쯤 곧바로 동해바다로 나갔다. 당시 동해는 태풍 ‘엘시’가 980밀리바의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해지며 24일 대마도를 통과한 후로 잔뜩 흐리고 너울도 컸다. 오후 8시쯤 울산 앞바다를 북상 중 동쪽 수평선에 흐르는 연기를 탐색, 괴선박을 발견하고 추적해 국제신호를 보냈으나 묵묵부답, 12노트 속력으로 계속 남하했다. 괴선박에 최대한 접근해 보니, 선체는 새까맣고 국기도 선명도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배였다. 배를 더욱 가까이 대 거의 3마일 정도에 이르러 서치라이트를 비춰 보니 1000톤이 넘는 배에 선수와 선미에 57㎜ 포가 있고 우리를 겨누고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일본군일까, 소련군일까 판단하던 차에 인민군으로 확신, 전 장교가 소집돼 전투에 돌입했다. 우리는 이때 ‘전력을 다해 적선을 격침하자’고 결의를 다지고 모든 장교들은 컵에 냉수를 따른 뒤 “이제 살아서 마지막일 수도 있다, 싸우자!” 고 외치고 건배했다. 나는 갑판사관(소위)으로서 포술 갑판분대를 소집해 함정 명령을 전한 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적을 때려 부수자, 죽어도 시체는 깨끗이 남기자, 내의와 작업복을 세탁한 것으로 갈아입어라!”라고 지시했다.

4시간여의 추적과 전투행동 등을 마친 시간은 26일 오전 0시 30분, 우리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고 동시에 적함의 주포와 기관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러나 한밤인 데다 날씨도 안 좋고 너울파도가 심해 우리나 인민군이나 제대로 맞지를 않았다. 이때 함장의 비장한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군함을 사올 때 돈이 부족해 포탄을 100발밖에 못 사와 이게 안 맞으면 더욱 낭패라면서 적선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것을 명령, 약 600야드까지 접근했다.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산다고 했을까. 코앞의 적함을 향해 직사포를 퍼붓는 족족 백발백중이었다.

우리 병사들은 빗발치는 탄우 속에서 기관총신을 냉수로 식혀가며 정말 죽기살기로 싸웠다. 적함 마스터가 꺾어지고 적 함교에는 불꽃이 피어 올랐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만세!”를 외쳤다.기관실이 파괴된 적함은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항속을 잃고 좌현으로 기울며 빠져 들어갔다. 이때 적 주포탄이 조타실을 뚫고 자이로 캠퍼스를 때렸다. 이로 인해 조타수 김창학 삼등병조가 전사했다. 김종식 소위는 발꿈치가 날아갔다. 그러나 3인치 주포의 집중사격을 받은 적함은 대한해협 바다 깊숙이 침몰했다. 때는 26일 오전 1시 40분, 1시간 10분여의 치열한 전투는 인민군 600여 명을 수장시키는 것으로 모두 끝났다. 우리는 부산항을 지킨 것이다.

<정리= 유호상 hosang61@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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