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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4: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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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07>
국난 극복사<7>고조선·고구려·백제 붕괴 교훈
[패망의 원인은 분열 외부의 적 아닌 내부의 적 / 2011.06.23]

국가나 왕조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후의 요인은 제도나 전략상의 실책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내부 분열’로 촉진된 권력체제의 붕괴가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고조선의 몰락은 물론이거니와 고대 한국의 고구려와 백제 왕조의 붕괴 과정을 살펴보면 그 같은 역사의 교훈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고구려 평양성의 북장대 사진
백제 수도 사비의 중심 방어지인 부소산성 사진

고조선의 최후, 왕검성 전투와 내부 분열-고조선 권력 내부서 문제 터져

고조선의 패망은 전쟁 자체의 패배보다 내부 분열이 이를 가속화시킨 전형적인 경우다. ‘동국병감’에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군과 한군(漢軍)의 전투 상황이 비교적 자세히 묘사돼 있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개전(B.C. 108 春) 2개월이 지나도 끄떡없었다. 왕검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한군의 지휘관들은 초조해졌고, 도리어 역심리전을 전개한 고조선군의 지연전으로 한군의 고심이 커졌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고조선의 권력 내부에서 터졌다. 우거왕이 직접 군을 이끌고 한나라군에 맞섰지만, 전쟁이 장기화하자 그 대책을 놓고 지휘권이 양분될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상 노인, 상 한도, 니계상 참(參), 장군 왕협은 우거왕에게 항복을 건의했다.

그러나 왕이 주전(主戰)을 역설하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결정하자 그들은 왕검성을 탈출해 한군 진영에 항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인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마저도 투항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우거왕은 농성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투항을 주장한 주화론자 참이 부하를 시켜 주전론자인 왕을 시해하고 한군에 투항하면서 사태가 급진전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신인 성기(成己)는 결사 저항을 했지만, 결국 한군의 지휘관인 순체의 사주를 받은 자에게 피살됐고, 수도 왕검성은 함락되고 말았다.(B.C. 108 夏)

백제, 지도층 분열과 수도의 치명적 결함-의자왕 등 지도층 실정 결정타

백제의 붕괴는 의자왕을 비롯한 지도층의 실정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염전사상(厭戰思想)’이 사회 전반에 확산됐고 국왕과 군 지휘관들의 정서적 불안정이 노출되기도 했다. 백제가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599년 법왕은 즉위와 동시에 ‘살생금지령’을 내렸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사살한 후 적의 심장부인 평양성으로 진격하던 야전군사령관 막고해(莫古解)는 ‘도덕경’을 운운하며 회군해 버렸다.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전쟁으로 심신이 지쳐 불교·도교에 심취한 나머지 빈번한 연회를 개최해 국민의 불안과 염전의식을 부추겼다. 신라가 종교적 살생금지를 교직자에 한정하고 민간에게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란 별도의 덕목을 만들어 국민적인 전의를 손상시키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640년 이후 의자왕은 백제 중흥의 마지막 불꽃이기라도 한 듯 신라에 대해 연전연승을 거둔 후 과감하게 정계 개편을 단행해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그러나 그것이 몰락의 길을 재촉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사치와 방탕을 백제 패망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그의 정치는 극단을 보여줬다. 왕족과 귀족의 파행적인 대립이 일어났고 당군의 침략에 대한 오판이 겹쳤다. 성충이 죽기 전에 전쟁의 가능성을 예고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정치적 안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었을까. 의자왕과 집권층은 옛 좌평 세력과 토착 귀족, 지방 토호들을 몰아내고 ‘총력전’으로도 모자라는 판에 자신들이 수긍할 만한 ‘자기 긍정적인 결정’에 집착했다.

결국, 계백은 초전의 신념대로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최후의 결전은 당나라군이 완전히 내지로 진출한 후 부여 남방 30리 지점에서 벌어졌다. 부여·강경·논산 일대는 산을 보기 어려운 지역이다. 있는 병력을 다 끌어 모은 백제가 다시 한번 당나라군과 맞섰으나 1만여 명의 사상자만 냈다. 정약용이 지적한 바와 같이 백제에는 ‘요동에 비견할 만한 쓸 만한 지형이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결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충의 말대로 당나라 군사와 평지에서의 대결은 피해야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은 그 틈에 웅진(공주)으로 탈출했다. 아마 부소산성을 돌아 백마강 기슭으로 내려와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사비성이 저항하는 동안 그는 병력을 모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둘째 왕자 태(泰)가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자 이 사태에 겁을 먹고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 항복해 버렸다. 결국, 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웅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고구려, 취약한 권력과 왕조 최후의 접합-연개소문 대막리지 취임

고구려 몰락의 한 중심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자리하고 있다. 연개소문과 그의 집안은 6세기 중반 이후 신흥귀족으로 성장해 귀족 연립정권 하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왕을 위시한 귀족들의 견제가 이어졌고, 대외적으로 당 침공이 노골화되면서 위기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대응책을 둘러싸고 갈등이 야기됐다. 642년 10월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구실로 반대파의 귀족들을 초대해 이들을 살육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스스로 대막리지에 취임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귀족회의가 약화한 상태라서 고구려의 권력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개소문은 강경의 대외 노선을 유지하며 통일제국 당(唐)에 결연히 맞서는 항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당의 압박을 분산시키고자 당을 측면에서 견제할 수 있는 나라와 동맹을 모색했고, 심지어 멀리 중앙아시아에까지 사신을 보내 당을 압박하는 대전략을 구사했다고 한다. 군사적으로도 전통적인 수성전(守城戰)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병과 기병의 전술에다 전차까지 결합해 충격·기동력을 활용한 평야전(平野戰)도 아우른 적극적 공세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무장으로서는 탁월한 능력의 소지자였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을 결여한 정치적 리더로서 권력의 전제성을 드러냈다. 시종 강경 일변도의 대내외 정책으로 군사력을 앞세운 강경 노선은 결국 실패의 단초가 됐다.

연개소문이 건재한 20년간은 분명히 대외적인 압박에도 고구려는 굳건한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사후였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바로 3년 만인 668년 10월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사실 고구려를 지탱한 마지막 보루인 연개소문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한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장남인 연남생은 권력을 승계했고, 33살의 그가 대막리지에 오르자 그 불만이 다른 귀족이 아닌 바로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남생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국내성으로 달아났고, 국내성 일대의 성들을 들어 당에 투항하며 침공군의 향도가 됐다.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도 원산만 일대와 강원도 북부지역을 들어 신라에 투항했다. 연씨 집안의 갈등과 분열은 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쐐기였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의 교훈-위기관리 제도·장치 갖춰야

정치적인 정통성을 결여한 권력은 비정상적인 강경 노선을 지향하거나 통치의 균형성을 상실한 채 전제성을 띠기 마련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자기 집착에 빠져 정치의 유연성이 결여되면 대내의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없게 된다. 백제나 고구려의 경직된 통치 권력은 유사시 위기관리를 위한 합리적인 제도와 장치를 갖추지 못함으로써 결국 국가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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