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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1: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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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2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6>
<16>화랑도 성장과 쇠퇴
[`삼국통일' 빛 발한 꽃에서 `사교단체' 빛 바랜 꽃으로 / 2011.08.25]

화랑도(花郞徒)는 신라의 주력군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6∼7세기경 그들은 누구보다 애국적이고 진취적이어서 나라를 이끌 주역으로 성장해 갔다. 조직과 리더의 개방성 때문이었다. 리더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청년과 무사들이 그 휘하로 몰려들었다.

화랑들의 전기를 기록한 화랑세기 사진.( 화랑 재현 모습)

신라 화랑도의 조직과 구성

화랑도의 원류는 초기국가 시대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 조직이었다. 그들은 중고시대(514~654) 초기에 일괄적으로 중앙에 흡수됐다. 정복전쟁기인 544년(진흥왕 5)에 핵심 부대인 대당(大幢)을 위시한 6정을 보충하려는 목적이었다.

화랑도는 몇 개의 집단이 존재했다. 중앙의 최고지도자는 화주(花主)로 국선ㆍ원화 혹은 풍월주라 불렀다. 진평왕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있었다. 각 집단에는 한 명의 화랑에다 약간의 승려와 화랑을 따르는 수백 명의 낭도가 있었다. 대개 낭도는 1000명에 달했고, 화랑은 신라를 통틀어 200여 명이 배출됐다. 화랑은 진골 귀족 중에서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고 사교성이 풍부한 미모의 남성으로 낭도들의 추대를 받아 뽑았다. 최고지도자 화주 밑에 중간지도층인 화랑과 그 하부에 낭도로 이뤄진 조직이 화랑도였다.

귀족 자제 가운데 선출된 화주와 화랑은 대체로 15세에서 18세의 청년으로 20세에 그만 둔 경우도 있었다. 낭도는 종래의 6부민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뤘다. 승려인 낭도는 종교의식이나 작사(作詞) 등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국가의 교육기관이 없던 당시에 화랑도는 통상 3년간 단체생활로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산천을 주유하며 수련을 통해 국가의 인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화랑도의 수련과 정신적 세계

6세기 말 원광법사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 두 청년의 맹세를 새긴 임신서기석(任申誓記石)은 화랑도의 수련 내용을 잘 보여준다.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취항은 화랑과 낭도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진평왕 19년(602) 8월 아막성 전투(남원 운봉)에서 백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충성과 효도, 신의와 용감 그리고 생명에의 존중의식으로 인격을 도야한 그들은 국가적 소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김부식(1075~1151)은 화랑의 실천적 표양을 ‘삼국사기’의 열전 편에서 놓치지 않고 적었다. 관창ㆍ흠운ㆍ사다함, 그리고 김유신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화랑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용기와 명예를 존중하고 충성을 최고의 고결한 삶의 가치로 여겼다. 경주 남산을 비롯해 금강산이나 지리산, 울산의 천전리 계곡과 같은 명산대천을 돌면서 국토에 대한 사랑과 애착심을 키운 그들의 흔적이 지금도 확인된다. 수령인 화랑은 김유신이 보여주듯이 홀로 깊은 산 속의 동굴을 찾아 단식기도하며 산신령의 계시를 받는 등 신비스런 체험을 하며 수양한 경우도 있었다.

화랑도에 대한 해석들

육당 최남선은 화랑도가 전국의 산악을 순례한 것에 주목했다. 대표적인 순례의 산이 금강산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운세도 오로지 금강산신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믿었다. 마치 희랍의 올림푸스처럼 신탁과 예언이 금강산에 의해 계시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기동 교수도 이를 흥미롭게 보고, 금강산에 미륵봉이니 미륵암이니 하듯이 미륵의 이름을 붙인 것이 많은 것은 불교 전래 이후 고유한 신앙 위에 불교적인 산악관인 ‘미륵정토 관념’이 습합된 것이라 지적했다.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현명한 재상과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과 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했다. ‘계원필경’을 남긴 최치원(崔致遠, 857~?)은 ‘난랑비서’에서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이른다. 그 도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해 중생을 교화한다”고 했다.

최치원이 말한 ‘현묘한 도’ ‘풍류’라는 표현은 흔히 도가적인 것으로 이해돼 왔다. 그런데 오늘날 풍류는 ‘우리 것’의 고유한 사상적 단초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최치원이 말한 삼교가 단군신화의 천(天) 사상에 기초한 우리 민족 고유의 인간화된 신을 의식하는 신인사상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위당 정인보도 ‘현묘한 도’ ‘풍류’ ‘선사’ 등이 도교나 불교식 용어로 쓰이지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포함삼교(包含三敎)’라는 의미가 외래 불·교·선 삼교를 본받아 혼성된 도란 뜻이 아니고 홍익인간이라는 고유한 교의 속에 이미 삼교가 포함돼 있다는 말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풍류, 화랑의 정신적 근원과 한국인의 원초적 신앙

민속종교학자 송항룡은 우리 민족의 ‘천(天) 사상’이 단순한 종교적 대상으로서 천상의 신을 향한 예배 위주의 신앙체계가 아니라 인간계의 합리화를 추구하고 보다 나은 현실을 구현해 나가려는 현세사상의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바로 신도(神道) 내지 선도(仙道)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도(선도)는 최남선이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주장한 ‘Park’사상, 즉 ‘ ’ 또는 ‘ 은’의 신앙체계와 연결된다. 선도사상은 실제로 각 ‘부족국가’에서 1년에 한 차례씩 국중대회를 열고 천신에 제사하고 나라의 대사를 합의해 처리하는 일로 나타났다. 명칭도 각기 달라서 부여에서는 영고, 고구려에서는 동맹, 예에서는 무천, 한에서는 불구내라 했다.

단재 신채호는 신라의 화랑을 ‘선도’와 연결시켜 이해했다. 그는 화랑이 문헌상으로 잔멸했을 뿐만 아니라 유적도 박멸됐다고 실토했다. 삼국시대의 1500년간 선비는 문사가 아닌 무사로 그들에게 무혼(武魂), 즉 선비정신이 있었다. 선비정신의 뿌리가 화랑을 거쳐 단군에까지 소급된다는 것이었다. “화랑의 별명은 국선이라 하며 선랑이라 하고 고구려 조의의 별명은 선인이라 한다. … 선인은 곧 우리의 국교이며, 우리의 무사도며, 우리 민족의 넋이며, 정신이며, 우리 국사(國史)의 꽃이다."

통일 이후 화랑도의 쇠퇴

통일이 되고 태평한 시대가 찾아오면서 화랑도는 무사단적인 성격이 약화됐고, 학교 교육을 대신할 입장도 아니었다. 682년(신문왕 2)에 정식으로 국학이란 교육기관이 설치됐기 때문이다.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변신에 실패한 것이었을까? 그들은 수도의 귀족과 부유한 소년들의 사교단체로 변질돼 갔다. 금강산으로 가는 유람은 말 그대로 풍류를 즐기는 사교행사가 됐고, 때로는 귀족의 정치세력과 연결돼 정치싸움에 말려들기도 했다.

재미학자 김종선(鍾璿)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화랑의 인격전환’과 ‘자기혁신’의 요소에 내재한 샤머니즘적 요소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화랑도에서 놀이라는 개념을 통해 귀족 자제에게 장려한 순국적 정신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본 요소가 됐다. 그러나 화랑의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과 ‘광신적 애국심’은 통일 이후에도 열광적 에네르기로서 그대로 잔존해 내부의 적, 즉 정치적 반대파를 말살하는 광포(frenzy)로 전락하고 말았다” 새겨 볼만한 견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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