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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8 08: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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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2>
<12>상무정신의 원류와 삼국 계승
[고구려·백제-사냥통해 통치·군사행위/신 라-화랑도 제정 중흥 이끌어 / 2011.07.28]

고구려인의 활달함을 보여주는 무용총의 수렵도 사진
신라의 두 청년이 학문을 닦고 힘써 실천할 것을 맹세한 내용을 새긴 임신서기석 사진

한국사에서 초기 국가에 해당하는 고조선의 상무적 전통은 한국 상무정신의 원류로 일컬어진다. 고조선 사회의 국중대회를 비롯해 국가행사로 거행된 각종 무술대회는 국가공동체의 단결과 화합에 크게 기여했다. 주민들은 활과 창·칼로 병기를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갖췄으며, 상무적인 사회 기풍은 강인한 투쟁정신을 단련시켰다. 전쟁에 군인이 따로 없고 모든 구성원이 군인이라는 의식을 가졌다. 선민으로서 전시에 천병(天兵)이 돼 출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조직화된 군대의 젊은 전사들이 그 길을 걸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상무적 전통

고구려에서는 건국자인 주몽이 명궁이었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통치자나 군사 지휘관에게는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기마선사(騎馬善射)’의 재능이 필수 덕목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동맹과 같은 국중대회(國中大會)가 열려 결속을 다졌고, 왕들은 전렵(田獵)을 행해 유목과 수렵의 풍습에 연원을 둔 통치행위와 군사행동을 수시로 행했다. 국왕의 전렵행위는 평양 천도 이후에는 중앙군의 군사훈련을 띠고 시행돼 국가적 수렵행사로 이어졌다.

사실상 고구려에서는 군사조직과 지방의 행정조직이 일체화돼 있었다. 평민의 교육기관인 경당(?堂)에서 청년들은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을 쏘며 병서와 무예를 익혀 문무겸전의 인재로 성장했다. 을지문덕이 바로 그렇게 배출된 대표적인 군사 엘리트였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같은 군사적 전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백제의 군사조직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통치조직과 함께 발전했을 것이다. 국왕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초기에 제천행사(祭天行事)나 국중대회가 있었고, 국왕의 정치적 권위와 국민의 결속을 위한 전렵과 순무 및 순행이 행해졌다. 또한 국왕의 통수권 차원에서 국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해 친솔(親率)하거나 병력을 파견하는 견병(遣兵)도 있었다. 백제에서도 국왕의 전렵으로부터 시작된 군사력에 대한 통제가 열병이나 대열과 같은 군대의 사열의식으로 발전한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대열(大閱)은 백제의 국왕이 5부(部) 단위로 존재한 군사력에 대한 중앙의 통제인 통수권 차원에서 행해졌다. 처음의 대열은 선주민 집단인 부의 군사력에 대한 국왕의 지배력을 통수하는 정치적 행위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대외관계에서 야기되는 군사행위의 대응형태로 나타났다. 관사나 습사 혹은 사대(射臺)의 건립과 운영은 사회 전반에 군사적 훈련이나 이를 시행하는 시설ㆍ기관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전렵은 기마전술의 보급과 발전을 촉진시켰는데, 일종의 권농(勸農)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국왕의 순행과도 결합됐다. 서기 8년 온조왕이 전렵을 빙자해 군사를 움직여 마한을 습격해 국읍을 병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신라 상무정신의 총화

신라사회의 상무적 기풍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국가적으로 훨씬 조직화됐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는 5세기 후반 고구려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던 상황에서 국경지대에 많은 산성을 쌓아 군대를 배치시켰다. 왕경으로 통하는 교통로도 개척해 전국적인 물자의 유통과 신속한 병력이동을 가능케 해 반독립적인 소국들을 해체하고 지방지배를 강화했다. 그리고 주·군의 책임자인 군주(軍主)·당주(幢主)를 모두 군 지휘관으로 임명함으로써 군사와 행정을 일체화했다.

삼국통일전쟁 때에는 임시군단으로 행군(行軍)을 편성해 대규모 병력을 징발해 동원했고, 간부요원을 보충하기 위해서 반관반민적인 성격의 화랑도(花郞徒)를 제정해 운용했다. 화랑도는 독자적인 이념으로 정신무장된 청년 무사도의 권화로 시대정신을 이끌어 신라의 중흥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마운령의 진흥왕비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곧 수기인고로, 민심을 탐방하고자 북행의 길에 올라 … 충신정성(忠信精誠)을 위하고 위국진절지도(爲國盡節之徒)에게 포상하려 한다”고 전하듯이 신라사회에서는 충의와 위국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기본 요체로 간주됐다.

신라의 청년 화랑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서약을 남겼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을 보면, 573년 진흥왕 34년으로 추정되는 임신년 어느 날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두 청년이 자신들의 희망과 맹세를 돌에 새겼다. 이들은 누구의 강압적인 요구도 없이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다짐하고 그 맹세를 함께 돌에 새겨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가히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서약한다.”

역사는 신라의 상무적 전통 속에서 자라난 신라 청년들의 삶과 죽음을 초월한 불굴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원광법사의 교시로 일깨워진 귀산과 취항은 ‘오계’의 정신을 목숨 바쳐 실천했다. 602년 8월 백제군이 아막성을 포위했을 때 귀산과 취항은 함께 참전했다. 처음 신라군은 백제군을 대파하고 추격했지만 천산의 연못가에 매복한 복병의 기습을 받고 말았다. 이때 귀산은 아버지 무은을 말에 태워 보내고선 취항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백제군과 싸웠다. 백제군의 복병은 전멸했으나 귀산과 취항도 전신에 상처를 입고 귀로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진평왕이 직접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해 시체 앞에 나가 통곡하고 예로 장사 지냈는데 그 죽음이 화랑정신의 사표가 됐다.

진덕왕 원년(647) 백제군이 무산·감물·동잠의 성을 침략하자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막았으나 신라군은 고전했다. 그때 비녕자ㆍ거진, 그리고 합절 세 사람이 보여준 행동은 용감하다기보다 차라리 비장했다. 흠춘의 아들 반굴(盤屈)도 그 뒤를 따랐다. 660년 백제 정벌전에 참전한 반굴은 그해 7월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황산벌에 이르러 계백 장군이 지휘하는 5000 결사대의 필사적인 방어전에 걸려 진격이 중단되자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적진으로 달려가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그 유명한 화랑 관창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관창은 장군 품일의 아들로서 의표가 단아했는데, 반굴이 전사하자 말을 달려 진두에 나섰다. 나이 16세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태종 무열왕에게 천거됐던 그답게 부친의 뜻대로 적진으로 쳐들어 가 적을 무찌르다가 사로잡혔다. 계백은 자신 앞으로 끌려온 관창이 소년인 것을 알고 그의 기상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냈다. 두 번씩이나 적진에서 되돌아온 관창은 적 장수를 죽이지 못한 것에 분개하며 물을 움켜 마시고 세 번째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이에 신라군이 죽기를 맹세하고 싸워 백제군을 대파시켰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신라의 상무적 전통

신라군의 이름으로 나라와 가족을 위해 싸운 신라 청년들은 자신의 삶을 초개처럼 버렸다. 그들을 통해 충과 효가 하나의 가치로 체현됐다. 어린 관창이 계백과 싸우다 죽었을 때, 그의 아버지 품일(品日)은 “국가를 위해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고 했다. 사회와 국가를 위한 지도층의 실천과 솔선수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바로 그것이 신라 사회의 또 하나의 저력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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