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敵 보급로 끊고 후방 차단"… 성공확률 5000분의 1 뚫어]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9일 수원에서 한강방어선을 살펴본 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북한군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전세를 한번에 뒤집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을 조속히 탈환해야 한국 국민들에게 정치적·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7월 초 맥아더 사령관 지시에 따라 미 극동사령부는 '100-B(인천)' '100-C(군산)' '100-D(주문진)' 등 세 가지 상륙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이 중 100-B 계획을 채택, '작전계획'으로 발전시켰다. 7월과 8월에는 북한군 공격이 예상 외로 강해 상륙작전을 감행할 여유가 없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처음부터 순풍을 탄 것은 아니었다. 미 합참뿐만 아니라 극동군 해군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유는 ▲인천은 간만의 차가 9m에 달하고 ▲낙동강 방어선과 거리가 멀어 각개 격파 위험이 크며 ▲원거리 상륙으로 상륙용 선박이 부족하고 ▲병력 차출로 낙동강 방어선 유지가 어려워지고 ▲병력 차출로 일본 방어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 등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은 5000분의 1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8월 23일 도쿄 미 극동사령부에서 미 육·해군 지휘관들이 상륙 장소를 결정하기 위한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여기에서 맥아더 장군은 45분간의 브리핑으로 참석한 지휘관들을 설득했고, 결국 미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 작전 계획을 최종 승인하였다. D-데이는 9월 15일이었다.
맥아더는 상륙 부대로 미 제10군단을 편성하고 극동군 참모장인 알몬드 육군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했다. 미 7함대를 주축으로 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부대장 스트러블 중장)는 함정 261척을 동원해 미군 2개 사단(1해병사단·7사단)과 한국군 2개 연대(17연대·제1해병연대) 등 한·미 연합병력 7만5000여명을 상륙시켰다.
북한이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9월 13일쯤 미 해군 함정이 인천 앞바다 비어수도에 출현한 이후였다. 다음날 북한군은 제18사단 22연대를 인천으로 이동시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세기의 도박'으로 불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일대에 투입된 북한군 13개 사단의 주력은 후방이 차단됐고, 이어 미 제8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의 주력은 일거에 붕괴됐다.
[최권삼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