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선까지 쳐들어온 북한군은 1950년 8월과 9월 2차에 걸쳐 총공세를 폈다. 8월 공세 때 북한군은 부산에 이르는 지름길인 대구 방면에 주공을 배치했다. 동시에 전 전선의 모든 접근로에서 공격을 전개해 아군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어느 축선에서든 돌파구가 생기면 이를 확대해 후방 깊숙이 진출, 전쟁을 종결하고자 했다. 북한군은 13개 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을 투입했다.
한미연합군은 최초 낙동강 연안(X선)에서 적 공격을 막아내다 8월 12일 축소된 방어선이자 최후의 저항선인 'Y'선으로 철수하여 북한군과 결전을 벌였다. 미 제8군은 적 주공이 지향된 대구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다부동 일대의 국군 제1사단 방어지대에 미군 2개 연대를 긴급 투입했다.
유엔군은 또 낙동강 대안에 집결된 북한군 병력 및 물자를 파괴하기 위해 대규모 융단폭격을 펼쳐 북한군에 심리적 타격을 주면서 그들이 전투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따라 8월 공세가 종반전에는 마산과 다부동 정면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북한군은 8월 20일부터 9월 공세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한미연합군은 병력 충원과 미 본토의 증원부대, 영국 제27여단의 도착으로 작전운용에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미 제8군은 8월 공세 때 상주-다부동-대구 축선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미 제1기병사단의 방어지역을 다부동 동쪽 가산산성 일대까지 확대시켰다. 8월 한 달 동안 다부동 일대를 끝까지 지켜 대구를 사수한 국군 제1사단은 인접 팔공산 북서쪽의 제6사단 방어지역의 일부를 인수, 국군 전체의 방어정면이 20㎞ 정도 축소됐다. 미 제8군은 영국 제27여단을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하여 미 제1기병사단의 확장된 방어책임을 보완하여 주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러한 상태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9월 공세 때 북한군은 새로 편성 중인 사단을 제외하고 13개 사단 모두를 5개 공격집단으로 편성, 대구·영천·경주·창녕·마산 정면으로 각개돌파를 감행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의 주요 지점인 다부동, 마산, 낙동강 돌출부, 영천, 포항 지역이 점령되거나 돌파됨으로써 한때 위기를 맞이했으나, 막강한 유엔 해·공군 지원 아래 미 제8군의 과감한 예비대 투입과 역습으로 적을 격퇴하고,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총반격작전에 나서게 된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