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공주·대전 저지선 잇따라 뚫리며 호남 위태…상주의 美25사단, 마산으로 진군, 최후 방어선 설치]
맥아더 원수는 1950년 7월 초 준비되는 대로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한국 전선에 보내려 했다. 그리고 미군 화력을 최대한 활용해 적 전력을 소모시키면서 일단 전선을 안정시키고, 그 후 상륙작전으로 적 후방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초월한 북한군의 공세에 부딪혀 이 구상을 상당기간 늦출 수밖에 없었다.
한미 연합전선의 형성이 일단 전쟁 초기 국면에서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했다. 유엔군의 지휘체제가 단일화되고, 이승만 대통령도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 위임하여 통일된 작전 체제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당시 유엔군의 전력은 미군 1개 사단뿐이었다. '스미스 부대'를 포함한 미 제24사단은 평택-안성선을 최초의 저지선으로 설정하였으나 적의 거센 돌풍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천안 일대의 사단 방어진지가 단 하루 만에 붕괴되었고 전의-조치원 방어선도 이내 무너졌다.
미군은 다음 저지선으로 공주-대평리 지역을 선정하고 적의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으나 이 또한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적의 전차 공격과 뒤쪽을 유린하는 게릴라 공격에 맥을 못 추고 무너졌다.
사단장 딘 소장은 당시 일본에 있던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으로부터 후속부대인 미25사단이 부산에 도착하는 20일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대전을 고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예하부대를 배치하여 적의 진격을 막도록 했다. 북한군은 7월 20일 새벽 세 방향에서 대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전후방과 좌우측에서 거의 동시에 공격을 받고 사단지휘부와 각 연대 간의 지휘통신이 두절된 채 혼전에 휘말리고 말았다. 당시 처음 보급된 3.5인치 대전차 로켓포(일명 바주카포)를 쏘며 분전했지만, 사단은 전투력의 절반 가까이 잃으며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고 사단장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딘 소장은 인민군에 포로가 돼 3년 후 휴전협정 때에야 풀려났다.
미군이 대전을 철수하면서 호남지역 상황이 대단히 급박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이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남진하여 호남지역을 빠른 속도로 석권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적이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침투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 명백했다.
워커 장군은 궁여지책으로 다소 덜 급한 상주에서 방어 중이던 미25사단을 마산 정면으로 돌렸다. 25사단은 온 힘을 다해 마산 일대로 진군했다. 그렇게 유엔군은 서남부지역에서 발생한 일촉즉발의 위기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낙동강에 연하여 모두 연결된 방어선에서 적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