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의정부서 교통체증… 16㎞ 진군에 36시간 걸려 국군 6사단, 춘천서 北 2사단 격퇴… 후방 침투 막아
전쟁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작은 전투라도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때를 누가 장악하느냐가 전쟁 전체의 승패를 좌우한다. 6·25전쟁 초기 전투에서도 국군과 북한군의 성공과 실패들이 교차했고, 각종 돌발변수들이 겹쳤다.
북한군 의도는 처음부터 뒤틀렸다. 우선 포천-의정부 축선. 북한군은 1950년 6월 26일 오후 1시 의정부를 점령한 뒤 창동을 거쳐 28일 오전 1시에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16㎞를 남하하는 데 36시간이 걸린 것이다.
도로와 교통문제였다. 북한군 3사단은 80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포천-의정부 축선으로 공격했다. 이 중 전차 40대와 일부 병력이 서울 동쪽을 우회 공격하기 위해 서파-비석거리-퇴계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서파 지역에서 전차들이 멈춰 섰다. 도로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포천으로 역행군, 26일 늦게야 의정부에 합류했다.
의정부에서는 '교통 체증'이 벌어졌다. 서파 쪽에서 되돌아온 전차와 병력이 합쳐지고, 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온 북한군 4사단과 전차 13대가 한꺼번에 몰렸다. 2개 사단 병력과 93대의 전차가 뒤엉키면서 북한군은 발목이 잡혔다.
여기에 용맹한 국군이 있었다. 한 무명용사가 의정부 남쪽 백석천을 넘으려는 전차를 공격했고, 이 때문에 백석교가 무너졌다. 북한군 서울 진입은 늦춰졌다.
서부전선에선 개성 남쪽에서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 방향으로 공격해오던 북한 6사단이 한강에 막혔다. 이 부대는 전 병력이 중국에서 온 '조선의용대'로 구성된 북한군 최강 부대였다. 하지만 소련에서 받은 1개 중대 분량 도하 장비로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한강 하류를 쉽게 넘을 수 없었다. 당시 김포 쪽에는 국군 방어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도 북한군은 이곳에서 3일을 지체했고, 육본이 긴급 편성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선전을 거두면서 북한군은 7월 3일에야 영등포에 진출했다.
춘천지역 방어전투는 전쟁 초기 국군의 최대 성공 스토리다. 국군 6사단은 춘천지역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2사단을 격퇴했다. 당일 춘천을 점령한 뒤 수원으로 진출, 국군 후방을 치겠다는 북한군 작전이 헝클어진 것이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인제-홍천 쪽으로 잘 나가던 12사단 2개 연대를 되돌려 춘천지역에 보냈다. 만약 북한군이 춘천 후방에서 포위 공격했다면 국군 6사단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김일성은 제2군단장과 2·12사단장 모두를 해임해버렸다.
초기 전투에서 선전한 국군은 철수해오는 병력으로 한강방어선을 쳤고, 유엔군 참전과 반격을 위한 시간과 전투력을 확보했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