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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09: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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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⑧ 지평리전투
[연대급 규모로 3개 사단 대적 … 중공군 `인해전술'도 무용지물]

지평리전투는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 당시에 미2사단 23연대와 이 부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원주 북방의 지평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막아 낸 방어전투다. 이 전투에서 미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의 사면 포위에 놓이게 됐으나, 미8군사령부로부터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면 방어태세로 배치,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 냈다. 그 후 미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그곳까지 진출함으로써 전선의 연결이 이뤄져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저지하는 데 중추 역할을 했다.

■ 중공군 의도와 유엔군 방어태세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의 일환으로 실시한 썬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의 결과로 서부전선에서 한강선까지 진출할 때,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의 후퇴를 만회하기 위해 미8군의 예상을 깨고 그들의 주력을 중부전선으로 이동시킨 후, 2월 13일 횡성을 탈취하고자 공격방향을 지평리로 향했다. 이때 중공군은 횡성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이 그 이남으로 철수할 것으로 판단했다. 중공군은 그들의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39ㆍ40ㆍ42군 등 8개 연대로 13일 저녁에 지평리 지역을 점령케 하고, 42ㆍ66군 주력과 120사단으로 하여금 원주 지역까지 진출해 서쪽으로부터 유엔군의 증원을 차단하면서 원주 일대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게 했다.

중공군이 지평리를 노린 이유는 명백했다. 지평리는 미9군단과 10군단을 연결하는 지점으로서 중부전선에서 서울-양평-홍천-횡성-여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잃으면 서부전선의 아군 측방이 크게 위협을 받게 돼 있었다. 반면 미8군이 지평리를 확보하면 한강 이남의 미1군단·9군단과 대치하고 있는 적을 포위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편 지평리는 2월 3일 이후 미2사단 23연대전투단의 작전지역이었다. 미23연대전투단은 미23연대를 주축으로 프랑스대대ㆍ1유격중대ㆍ378포병대대ㆍ503포병대대 B포대ㆍ82대공포대대 B포대ㆍ2공병대대 B중대로 구성됐고, 총 병력은 5600명이었다.

또한 지평리 주위는 280미터 내외의 고지가 있어서 직경 5킬로미터의 사주방어를 편성하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3개 대대가 담당하기에는 너무 방대했으므로 연대장은 진지를 마을 중심으로 축소해 1.6㎞ 방어선을 설정했다. 이후 연대장은 진지를 편성하고, 지뢰와 철조망을 설치해 방어 간격을 보강했다. 그리고 대공포와 전차에 의한 직접사격이 가능토록 했고, 포병으로 하여금 보병진지 주변에 탄막사격을 계획했다.

중공군이 지평리를 공격할 때, 미10군단 주력은 횡성에서 이미 철수했기 때문에 미23연대는 고립된 상태였다. 이에 연대장 프리먼(Paul Freeman) 대령은 여주로의 철수를 건의했으나,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평리를 잘 선정된 전투장으로 판단하고 이곳에서 중공군을 최대한 흡수해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을 집중해 격멸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 중공군의 공격과 전투 경과

1951년 2월 13일 밤,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나팔 등을 불며 연대의 전 정면에 걸쳐 공격해 왔다. 이에 미23연대는 사전에 매설한 지뢰와 철조망, 그리고 포병화력으로 적을 저지했으나, 적은 분대규모의 병력으로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그것은 마치 파도가 계속 해안으로 밀려오듯이 하는 제파식 공격이었다. 중공군의 이런 공격으로 중대 진지가 한때 돌파되기도 했으나, 전차로 증강된 역습을 통해 이를 격퇴해 나갔다.

특히 프랑스대대가 방어하는 지역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끈질겼다. 전투 개시 다음날인 2월 14일 02시쯤 중공군의 제2파가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공격해 왔을 때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군도 중공군의 나팔 소리에 대한 맞불작전으로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적의 기세를 제압했고, 또 적이 진내에 들어와 백병전이 불가피해지자 대대장 몽클라(Ralph Monclar) 중령을 비롯한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적을 위협해 가며 싸웠다. 이 싸움에서 프랑스군은 결국 중공군을 격퇴했다. 이 공로로 프랑스군은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이처럼 중공군과 미 23연대와의 지평리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2월 15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전투과정에서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예비로 확보해 뒀던 돌격중대까지 투입하며, 적과 똑같이 함성을 지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으로 맞서며 공격해 오는 적이 질릴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

이때 연대장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며 끝까지 부하들과 함께 싸우며 승리를 쟁취했다.

전투 간 미8군사령관은 지평리 상황을 주시하며 공군과 보급품을 지원했다. 특히 14일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미9군단의 예비인 크롬베즈의 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 지평리에 투입했다. 크롬베즈부대는 15일 아침 항공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어렵게 되자, 병력 160명으로 구성된 1개 보병중대와 전차 23대로 공격조를 재편성해 다시 공격했다. 결국 크롬베즈가 지휘하는 공격조는 중공군의 무차별 공격 속에서 15일 17시쯤 드디어 미23연대와 연결했다. 이렇게 되자 미23연대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이 퇴각하게 됐다. 이때 미군 진지 주변에 흩어진 중공군 시체만 2000여 구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사상자 수는 미23연대 병력인 4946명으로 추산됐다. 반면 미23연대는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미23연대는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신속히 공세로 전환해 16일 오전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적을 추격하며 전과를 확대해 나갔다.

■ 지평리 전투의 의의

지평리 전투는 1950년 중공군 개입 이래, 유엔군이 처음으로 중공군 대규모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며 싸움으로써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고립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진지고수 의지와 철저한 야간사격통제, 예비대의 적절한 운용과 역습, 그리고 화력의 우세와 긴밀한 공지합동작전으로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며, 적의 2월 공세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침내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그들의 2월 공세에 실패했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돼 재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또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실패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해 자신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38도선 회복을 위한 작전에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지평리전투에서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를 하게 되자, 중공군 3차 공세 시 37도선까지 밀려나며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유엔군의 사기를 다시 추슬러 가며 중공군에 대한 공세를 펼치게 됐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손에 손을 잡고, 서로 어깨를 맞대며 38도선으로 향해 강력한 공격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그 결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한데 이어 38도선 일대를 다시 확보하게 됐다. 이것은 모두 지평리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해서 얻어진 값진 결과였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포격에 부상당한 연대장, 끝까지 남아 전투지휘]

■ 몽클라 대대장과 프리먼 연대장

지평리전투에서 아군이 승리하는 데는 연대장 프리먼 대령과 프랑스군 대대장으로 참전한 몽클라 중령의 뛰어난 리더십과 활약이 있었다.

프랑스군의 몽클라 중령은 제1·2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3성 장군 출신의 노장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대 규모를 파견하는 프랑스군을 지휘하기 위해 중령 계급장을 달고 한국 전선에 뛰어든 별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대대 규모의 프랑스군을 지휘하면서 그 용맹함을 떨쳐 나폴레옹의 후예임을 우방국 군대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또한 몽클라의 프랑스군을 포함해 미23연대전투단을 통합지휘했던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도 후송을 거부하고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는 투혼을 발휘하며 싸워 미군의 명예를 드높였다. 개인적으로 프리먼 연대장은 지평리전투의 승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장차 4성 장군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게 됐다. 프리먼 연대장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한 핸디캡 때문에 이를 만회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작전계획 수립에는 그의 상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이처럼 그가 작전 분야에서 인정받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를 인정한 상관 중에는 육군총장·국무장관·국방장관을 역임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오늘날 미국의 위대한 군인으로 존경받고 있던 마셜(George Marshall)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의 전도는 암담했다. 당시 미군의 분위기는 전투 경력이 있는 장교를 선호했다. 그가 해야 될 연대장 자리는 대폭 줄었고, 사단장들은 지휘 경험이 있는 장교를 연대장에 기용했다. 전투 경력이 없는 장교들은 일종의 찬밥 신세였다. 프리먼도 영관 장교로 끝날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알고 있던 마셜 장군의 도움을 받아 그는 당시 고급장교들의 필수 코스였던 국방대학원에 갈 수 있었고, 6·25가 발발했을 때는 23연대장에 보직돼 한국으로 가게 됐다.

하지만 한국은 그에게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아내에게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지역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우리는 이곳에 너무 늦게 도착했으며 파견된 군대의 규모도 턱없이 모자란다오. 그런데 적은 뒤로 물러서거나 위축될 기미가 보이지 않소. 이에 나는 연대장으로서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열정적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소. 어떤 상황에서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오”라고 편지를 썼다. 프리먼은 이런 열악한 전장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 다짐했던 연대장으로서의 책무와 군인으로서의 전투 프로다운 모습을 보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한국전선에 뛰어들자마자 낙동강 최대 혈전 중의 하나였고 전사가들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시 유럽의 벌지(Bulge)전투에 비견됐던 낙동강 돌출부의 영산전투와 6·25전쟁에서 미2사단이 해체될 정도로 참패를 당했던 군우리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능력을 발휘해 그의 23연대만은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냈다.

결국 이때 살아남은 미23연대는 그 후 지평리전투에서 군우리에서 그의 사단이 당했던 불명예스러운 치욕을 되갚고 응징함으로써 그들이 늘 자랑스러워한 인디언 헤드부대의 명예를 되찾게 됐다. 이때부터 그가 속한 미2사단은 벙커고지전투, 단장의능선전투, 피의능선전투를 거쳐 미군 사단 중 유일하게 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수없이 많은 산악전투를 전개하며 그 용맹성을 과시했다.

지평리전투에서 프리먼 연대장은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 밤새도록 진지를 둘러보고 예하부대 장교들을 격려하며 전의를 북돋아 줬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프리먼의 지휘소 텐트에까지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져 연대정보장교인 슈메이커 소령이 전사했고, 또 이때 프리먼 연대장을 비롯한 다른 장교들도 부상을 입었다. 프리먼은 이때 운이 좋았다. 텐트 안의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는 자세를 고쳐 누웠는데 그때 텐트 안으로 뚫고 들어온 파편이 그의 왼쪽 종아리에 박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먼은 다리를 쩔뚝거리며 전방을 직접 현장지도하며 전투를 지휘해 나갔다. 이때 미10군단장 알먼드 장군은 부상당한 프리먼을 교체하려고 하자, 프리먼은 “제가 우리 부대원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 마무리도 제 손으로 직접 하겠습니다”라며 전투를 지휘했다. 이렇듯 지평리전투 승리의 중심에는 명(名) 연대장 프리먼 대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이 전투를 승리로 끝낸 후 바로 후임 연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 후송됐다. 지평리전투는 그가 나중에 4성 장군으로 오르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지평리전투 실전같은 재연행사-“총알이 없으면 몸으로 막아라”]

지난달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서 59년 만에 때 아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요란한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누비 군복을 입은 중공군이 일제히 미 육군2사단과 프랑스대대 방어진지로 밀어닥쳤다.

참호 속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과 프랑스 병사들은 중공군이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참호에서 15m쯤 거리까지 중공군이 도달했을 때 프랑스 병사들은 일제히 철모를 벗어 던지고 참호 밖으로 튀어나와 함성을 지르며 중공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처절한 백병전 끝에 중공군이 퇴각하자 프랑스군과 미군들은 프랑스 국기·성조기·태극기를 펼쳐 보이며 만세를 외쳤다.

이 같은 전투 모습은 6·25전쟁 당시 지평리전투의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육군20기계화보병사단 장병 1000여 명과 전차 12대가 투입된 이날의 전투 재연 행사는 1951년 2월 중공군 4차 공세에 맞서 사흘간 지평리를 방어한 실제 전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시 참호 속의 프랑스군과 미군은 전투 재연 행사 때의 모습처럼 최후 방어 순간 과감한 백병전으로 중공군과 대항해 진지를 사수해 냈다.

지평리전투에 참전한 프랑스 참전용사와 그 가족 82명과 미국 참전용사 100명, 한국군 참전용사 141명을 비롯해 국내 프랑스인·보훈단체 등 2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전투 재연 행사는 사실감 넘치는 전투 재연으로 뭉클한 감동을 줬다.

이날 행사를 통해 59년 만에 “단 한 사람도 내 허락 없이 물러나지 마라, 총알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막아라”라는 몽클라 중령의 용맹한 외침을 다시 듣게 된 프랑스 참전용사들은 이날 감회가 남다른 모습이었다.

한편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 6·25전쟁 60주년 사업단은 9월 낙동강지구 전투 전승행사와 10월 화령장전투 전승행사 등에서 이번과 같은 전투 재연 행사를 개최, 유엔 참전용사와 국군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기릴 수 있는 분위기를 이어 갈 계획이다.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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