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가 아니라 후방의 적 격멸” 10배 넘는 중공군에 치명타]
인천상륙작전에서 주력부대로 활약했던 미 1해병사단은 맥아더 원수의 원산상륙작전계획에 따라 다시 원산항으로 이동했다. 원산에는 북한군이 3000여 기의 기뢰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단은 기뢰를 제거할 때까지 20여 일 원산 앞바다에서 대기하다가 10월 26일에야 원산에 행정상륙했다.
이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는 황초령을 넘어 11월 16일,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下碣隅里)를 점령했다.
하갈우리는 흥남으로부터 120여㎞ 떨어진 곳으로,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진출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하는 개마고원 지대로 해발 고도 1000~2000m의 낭림산맥을 따라가는 고산 지대였다. 따라서 황초령과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기복이 극심한 협곡도로였다. 때문에 유일한 도로는 전차의 통행이 불가능했고 우마차나 다니면 좋을 만했다. 또한 그때부터 작전지역에 눈이 쌓였고 야간에는 수은주가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시작됐다. 지형과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 미 해병1사단의 장진호 진출
한편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인해 청천강 선으로 철수했던 미 8군은 맥아더 원수의 최종공세 명령에 따라 11월 24일, 일제히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어 27일, 동부지역의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집결하고 있는 사단에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장진호에서 무평리(武坪里 : 희천과 강계 중간지점) 방향으로 공격, 제8군과 연결 후 강계 방향으로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동부와 서부전선 사이에 생긴 간격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미 10군단장은 미 사단이 서부지역으로 신속히 진출해 서부지역의 적을 제8군과 함께 두 개의 방향에서 공격해 줄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사단의 주보급로가 확보되고, 보급추진을 위한 비행장이 건설돼야 사단의 진출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도로 확장공사와 함께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에 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병행했다. 그로 인해 사단의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군단장의 독려에 따라 사단장은 25일, 7해병연대를 유담리(柳譚里)까지 진출시킨 후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가담하기로 했다.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7연대는 25일, 내륙공격의 발판이 되는 유담리를 저항 없이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제5연대가 유담리에 도착해 7연대와 합류했다. 이어 2개 연대는 27일 오전 8시, 크리스마스 공세의 일환으로 공격을 시작했으나, 곧바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저지되고 말았다.
■ 제5·7해병연대의 철수
11월 27일 오후, 제7연대의 정찰대는 “중공군이 사방에서 유담리를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개 연대는 방어로 전환해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어둠이 밀려오고 기온이 영하 32도까지 떨어져 미군의 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자 중공군은 예상했던 대로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공간이 협소한 유담리 일대는 일순간에 곳곳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아비규환의 장소로 바뀌고 말았다.
미 사단을 공격한 중공군은 장진호 일대에 야전군 규모인 9병단 예하 3개 군(12개 사단)을 투입했다. 그중 4개 사단을 유담리 주변에 배치해 미군 2개 연대를 포위하도록 했다. 또한 4개 사단으로 하갈우리~황초령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나머지 4개 사단은 예비로 확보해 두고 있었다.
미 사단이 상대하게 될 중공군은 수적으로 해병사단의 10배 규모였다. 또한 그들은 미 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포위망 속으로 해병사단을 유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1월 28일 오전 11시, 해병사단의 두 연대장은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물론 현 진지 고수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유담리의 방어태세를 강화하는 조치가 시급하다는 사실에 합의하고 임무를 분담했다. 이어 30일, 유엔군사령부의 철수명령이 접수됐다. 양개 연대는 12월 1일,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해 사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12월 1일 오전 8시, 철수를 시작한 해병 2개 연대는 도처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4개 사단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아 진출이 매우 부진했다. 그 가운데도 2개 연대의 협조된 철수작전이 빛을 발휘했다. 악전고투를 거듭한 2개 연대는 12월 4일, 마침내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에 집결할 수 있었다.
그들이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22㎞를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77시간이었다. 1㎞를 진출하는 데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철수 중에 발생한 600여 명의 부상자를 들것에 태워 부대건제를 유지하면서 질서 있는 철수를 계속했다. 해병대의 용맹성을 또다시 확인해 준 쾌거였다.
당시의 5연대장이었던 머레이 중령은 후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악몽과 같은 곳에서 혈로를 개척하고 나온 지난 5일간의 낮과 밤은 지금까지 해병대가 겪어 본 일이 없는 최악의 사태였다. 특히 유담리 부근에서는 매일 밤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 사단의 `새로운 방향 공격'
장진호 남쪽 끝에 위치한 하갈우리는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사단사령부와 보급시설이 위치한 중추적인 지역이었다. 그곳에는 사단장의 의지에 따라 간이 활주로를 설치하는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시 하갈우리 일대에는 1만여 명의 병력과 1500여 명의 피란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이 집결해 있어 매우 혼잡했다. 그 같은 대규모 병력과 4300여 명의 부상자를 대동하고 황초령을 넘어 함흥까지 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미 사단은 공사 진척이 40% 수준인 하갈우리의 간이 활주로에 C-47 수송기를 착륙시켜 본 결과 항공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해병사단은 4300여 명의 부상자를 항공기로 후송할 수 있었다.
그때 극동군 수송사령관 터너 준장이 사단을 방문했다. 그는 사단장에게 “모든 전투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중 철수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스미스 소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와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라며 터너 준장의 제의를 일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항공철수를 할 경우 활주로 엄호를 위해 최소한 2개 대대 정도는 마지막까지 공항에 잔류해야 했다.
그러나 남은 2개 대대의 생사를 보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스미스 소장은 “주력의 철수를 위해 2개 대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불명예스럽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상적인 철수 결심을 굳힌 사단장은 각 제대가 철수준비를 하는 동안 장병들에게 “사단은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의 공격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장병들의 전투의지를 고양시켰다.
철수준비를 마친 사단은 12월 6일 06시에 하갈우리에서 철수를 시작해 12월 7일 두 번째 집결지인 고토리에 도착했다. 이때 하갈우리에서 공산군의 격퇴를 위해 협조했던 1500여 명의 민간인도 함께 철수했다. 이제 해병사단에 남은 과제는 영하 32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함께, 중공군이 사단의 철수로 차단을 위해 파괴시킨 수문교에 조립교를 설치하는 것과 황초령을 통제할 수 있는 1081고지를 사전에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중공군 제9병단장 쑹스룬(宋時輪)은 “이번이 유담리와 하갈우리에서 실패했던 치욕을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라며 4개 사단을 황초령 일대에 추가 투입해 강력한 저지선을 구축하게 했다. 황초령은 신라의 진흥왕이 순수비를 설치했던 지형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토리에서 철수준비를 마친 해병사단은 12월 8일 08시, 황초령을 향해 철수를 시작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관문은 수문교 통과였다. 이를 위해 사단의 공병대대는 군단의 지원을 받아 12월 9일 15시쯤, 항공기로 수송된 조립교를 파괴된 수문교에 설치했다. 그리고 밤을 이용해 병력과 차량들이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며 통과했다. 이 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손쉽게 수문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공군도 살인적 추위와 보급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전투력 발휘에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인 황초령 통제를 위해 1연대 1대대에게 황초령 정상의 1081고지 확보를 명령했다. 제1대대는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적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한 끝에 사단의 본대가 도착하기 직전에야 가까스로 황초령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해병사단은 살인적인 혹한과 사투를 거듭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황초령을 넘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전의를 상실한 듯 엄체호 속에서 저항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 후 사단은 철수를 계속해 12월 11일 23시쯤, 함흥을 거쳐 흥남에 도착함으로써, 적과의 접촉을 단절하고 기나긴 철수작전의 막을 내리게 됐다. 해병사단이 11월 27일, 유담리에서 철수를 개시한 이래 적과 접촉을 단절한 12월 11일까지 17일이 소요됐다. 기간 중 인원손실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으로 총 손실은 2621명이었다.
반면 해병사단과 맞섰던 중공군 9병단은 12개 사단을 투입해 해병사단의 철수를 포위하고 차단했다. 그러나 해병사단의 강력한 화력과 강인한 공격에 의해 돌파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9병단은 막대한 인원손실을 입고 궤멸돼 함흥 일대에서 4개월 동안의 부대정비 후에야 차후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中 피해 심각 `3차 공세' 차질 … 전쟁 판국 달라져]
■ 장진호전투의 교훈
중공군은 정예부대로 이름난 미 해병사단을 포위·섬멸할 경우 미국 국민들이 입게 될 심리적 충격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해병사단을 포위한 후부터 선전매체를 통해 “미 해병사단의 포위·섬멸은 시간문제다”라고 계속 선전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들도 미 해병사단의 포위와 철수과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장진호전투는 단순한 1개 사단의 철수전이 아니라 미·중 양국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그런 상징적인 전투에서 해병사단이 결국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해병사단이 항공기로 철수하지 않고 지상 철수과정에서 부대건제를 유지하면서 중공군 병단에 가한 치명타는 중공군 전체 작전에도 심각한 타격을 줬다. 나아가 전쟁의 전반적인 국면에도 큰 영향을 줬다. 만약 해병사단이 중공군 병단의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했거나 항공철수를 했을 경우 어떤 상황이 야기됐을까? 아마도 함경도 일대에까지 진출했다가 철수하는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은 물론 미 10군단 전체가 중공군에게 포위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해병사단의 철수는 단순히 1개 사단의 후퇴작전 성공이 아니라 1개 군단을 위기에서 구해낸 엄청난 성과였다.
한편 중공군 병단은 장진호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그해 12월 31일부터 시작해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점령했던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 제3차 공세 당시 한반도 포기와 철수를 검토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몰렸었다.
따라서 병단이 장진호전투에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제3차 공세에서 주력으로 활용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3차 공세를 감행한 중공군이 수원 일대에서 진격을 멈추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중공군이 병단을 투입해 금강, 또는 대전선까지 진출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상황이 야기됐을까? 그 경우 유엔군은 또 다시 낙동강까지 철수하거나 아니면 아예 한반도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병사단이 수행한 장진호전투는 “나라를 구한 결정적인 전투”로까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 장진과 초신
‘초신휴(The Chosin Few)’는 미국의 장진호전투 생존자 단체의 명칭이다. 1983년에 창설돼 7000여 명의 회원이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살면서 장진호전투의 전사자 및 실종자 가족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단체의 명칭에서 초신(Chosin)은 북한의 지역 명칭인 장진(長津)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고, 휴(Few)는 생존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도 각국의 참전용사들은 장진호(長津湖)전투를 “초신전투(combat of Chosin)”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과거 일본어로 표기된 북한지역 지도를 사용했던 유엔군사령부가 장진(長津)을 일본식 발음에 따라 초신이라고 표기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5일부터 12월 22일까지 중공군 제2차 공세 기간 중에 발생한 전투다.
특히 6·25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 가장 치열했고 가장 어려운 여건 하에서 치러진 전투 중 하나이며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남긴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미군 장병들이 말하는 장진호전투-온통 시체로 뒤죽박죽 지옥의 한 장면이었다.
장진호전투에 대한 미국 참전 장병들의 경험담은 극한 상태의 체험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점철돼 있다. 1996년 6·25전쟁 참전 미군 장병들의 참전 체험 수기를 모아 미국에서 출간된 ‘한국의 초상’에 실린 장진호전투 관련 수기 두 건을 소개한다.
■ 미 해병1사단 존 바스티안 상병
흙이 위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잠이 깼다. 위험을 느껴 침낭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침낭 밖으로 나오려는데 지퍼가 내려지지 않았다.
자는 동안 지퍼에 입김이 서리면서 얼어붙은 게 분명했다. 경위야 어찌 됐든 나는 침낭 속에서 갇힌 채 스스로를 방어할 대책이 없었다.
꿈틀거리면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계속해서 지퍼를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지퍼 틈 사이로 중공군이 수류탄을 집어서 폭발시키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중상을 입은 상태여서 수류탄을 빨리 폭파시키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악다구니를 퍼부으면서도 침낭 지퍼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침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일어났다. “그래,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떴을 때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옆에 있다가 나의 고함 소리를 들은 동료 해병이 쏜 총알이 내 머리 위 약 15㎝ 높이로 날아와 나를 죽이려던 중공군을 맞혔던 것이다.
■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
장진호 동쪽의 풍류리 하구에서 중공군과 싸웠던 나흘 낮, 다섯 밤에 걸친 전투와 포위망 돌파작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1월 27일 밤 6시간에 이르는 백병전 끝에 중공군을 물리치고 방어선을 다시 구축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주변 일대의 적과 우리 편의 시체로 뒤덮였다.
이 기습 공격에서 많은 미군 병사들이 침낭 속에 잠든 채 적의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 날이 밝은 다음에 부대는 재편성되고 전사자로부터 탄약을 회수해 생존자에게 재분배해야 했다. 방어선 일대의 모습은 마치 단체가 묘사한 지옥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했다. 그것은 흩어진 무기와 여러 장비 그리고 미군과 중공군의 시체들로 뒤죽박죽이 된 대혼돈의 마당이었다.
전투 제3일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되자 적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적이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웠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정리=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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