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사수하라!” 사상 첫 한미연합작전 눈부신 전과]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기로에서 1950년 8월 초 북한군 전선사령부는2군단 예하 15·13·1사단 등 3개 사단을 함창 일대에, 2군단 예하 3·10사단 등 2개 사단을 왜관 서측에 집결시켜 총 5개 사단으로 대구를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 국군의 전선 조정과 다부동 방어선 편성
육군본부에서는 낙동강방어선을 편성한 직후부터 전체의 중대한 작전 전환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1사단을 제외하고는 이미 강을 장애물로 이용할 수 없는 데다가 전체 방어 정면이 너무 넓어 부대 간 연결도 이루지 못하고 적의 돌파를 저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 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각 사단에 하달했다. 이에 따라 국군 1사단이 12일 야간 다부동 일대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다부동 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들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해 전술상 대단히 중시됐다.
국군 1사단은 13일 다부동 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15연대가 328고지 일대, 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 11연대가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했다. 북한군도 13일 3사단 일부 병력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해 328고지로 공격하고, 13사단이 국군 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했으며, 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고지를 선점하고 말았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이 미처 방어선을 편성하기도 전에 중앙이 돌파될 위기를 맞았다. 이는 부대가 진지를 전환하면서 전방에서 새로이 진지로 바로 진입하지 않고 후방에 집결한 후 역진입하는 전술적 우를 범함으로써 비롯된 결과였다. 국군 1사단은 그 결과로 인해 이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북한군은 8월 15일부터 총공격을 재개했다. 국군 1사단은 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했고, 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했으며, 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됐다.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B-29 98대의 융단 폭격이 실시됐다. 이 폭격은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 다부동의 위기와 미군 2개 연대의 증원
아군의 융단 폭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신주막~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8월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 큰 위기에 놓였다.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미 8군은 즉시 미 8군 예비인 미 25사단 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했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북한군이 대구역 부근으로 향해 박격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대구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란령을 하달했다. 국군 1사단은 위기상황를 타개하기 위해 18일에 지원된 미 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 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미 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해 보·전 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1사단이 미군과 협조된 공격을 실시했다.
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했고, 12연대는 쌍방 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빼앗기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반복했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 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미 8군 명령에 따라 미 2사단 23연대가 두전동 일대에 배치돼 방어력을 보충했다. 육군본부에서도 국군 8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 일대에 배치했다. 이처럼 다부동 일대는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대가 지원될 만큼 상황이 위급했다.
또한 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명~700명의 손실이 발생해 병력이 날로 감소하게 되자 신병과 학도병으로 보충했다. 또 이 무렵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들이 배치돼 전투원의 식사를 비롯한 탄막과 기타 보급품을 지게로 최전방까지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 북한군의 공세 약화와 최초의 전차전 전개
8월 20일 야간 적측에서 갑자기 중대한 작전의 변화가 있었다. 적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이동시켜 공격하도록 했다. 이로써 적은 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돼 공격력이 크게 약화됐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의 위협이 가중돼 위기를 맞고 있었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8월 21일부터 점차 다부동의 전황은 점차 호전돼 갔다. 이날 야간의 일로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6·25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됐다는 것이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11연대로, 주공을 미 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해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했다.
미 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해 적 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해 적에 대응했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 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하면서 불꽃을 튀겼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27연대 장병들은, 불명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공이 맞은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해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 해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 했다.
날이 밝자 진전에는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과 수대의 트럭 그리고 1300여 구의 시체가 확인됐다.더구나 다음날 오전 적 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11연대 지역으로 작전 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 의지는 극도로 저하됐다. 12연대는 이날 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해 마침내 유학산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 마지막 위기의 극복과 전과의 확대
미 8군과 육군본부의 조치로 다부동의 방어력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23일에 적 1사단 1연대는 국군 1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741고지를 점령하고 또 일부는 가산까지 침투했다. 이들은 11연대 지휘소의 기습에 이어 그 부근의 미군 포병진지를 공격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미 27연대와 볼링장 계곡에서 공격을 계속해 신주막을 점령하는 한편, 10연대와 미 23연대는 우인접 6사단에 배속된 독립기갑연대, 15연대와 동시작전을 전개해 가산 일대로 침투한 적을 격퇴하고 다시 741고지를 점령함으로써 8월 공세 마지막에 조성된 다부동 동측방의 위기를 수습했다.
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미 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돼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했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돼 거의 접촉을 단절했으며, 귀순한 포병 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전사상자 1500명이 발생, 총 3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있었다. 1사단은 28일 수암산도 피탈 10일 만에 탈환했다. 결국 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돼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야 점령한 결과가 됐다. 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해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군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융단 폭격 실시-전무후무한 `융단폭격' 북한군 아수라장
1950년 8월 16일 왜관 일대에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융단 폭격이 실시됐다. 1950년 8월 14일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의 국군 1사단 정면에서 3·13·15사단 등 3개 사단으로 각각 중앙 돌파를 기도하고 있었다.
미 8군사령부 정보처에서는 왜관 북서쪽 부근에 적 3개 사단과 105전차사단이 집결하고 있으며 그 병력은 4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또 국군 1사단 12연대 정보과에서도 수색대의 보고를 통해 연대 정면에 2개 사단이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미 8군은 이 같은 정보를 보고받았으나 전반적으로 병력이 부족해 왜관 정면의 적에 대한 별다른 대비책이 없었다. 이에 미 8군 작전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생로 지역에 감행한 융단 폭격을 생각하고, 이를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아군 지상부대의 피해를 우려해 우선 낙동강 대안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고 그 성과를 본 후 8월 19일 다시 낙동강 차안 일대에 폭격하기로 계획했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관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에게 국군 1사단 방어지역 좌측방, 즉 왜관교 북쪽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1950년 8월 16일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출격한 B-29 전략폭격기 98대가 이날 11시 58분부터 26분간 400~900㎏ 폭탄 960톤을 투하했다.
하지만 융단 폭격이 끝난 뒤 공중·지상관측으로 전과를 확인할 수 없어 2차로 계획된 19일의 융단 폭격은 취소됐다. 다만 그 이후 한동안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방어지역에 대한 적의 포격은 현저하게 감소됐다. 당시 북한군 2군단 통신대 소속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했던 북한군 김윤문 소좌는 융단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B-29의 융단 폭격으로 북한군의 손실은 매우 컸다. 약목 부근 낙동강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 3사단과 15사단의 예비대·지원 포병 그리고 공병·전차·탄약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이 파괴되고 유선이 모두 절단돼 대혼란이 빚어졌다. 북한군 2군단장 김무정을 비롯한 군단 간부들은 이때부터 동요돼 승리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고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북한군 2군단에서는 B-29 120대가 출격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피해에 대해서는 일절 말도 못하게 해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 다부동 전투에서 한미연합작전의 중요성-한미 양국군 `피보다 진한 신뢰감' 계기
6·25전쟁 이후 다부동 전투를 통해 한미 간의 실질적인 연합작전이 최초로 이뤄졌다. 미 8군은 대구 관문인 다부동 지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18일 군 예비인 미 27연대를 증원한 데 이어 다음날에는 미 23연대를 두모동에 종심 배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비록 미군 2개 연대가 국군 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를 받지는 않았으나 이들 미군 부대가 국군 1사단의 작전 책임 지역에서 공동의 작전 목표를 위해 긴밀한 협조체를 유지하는 가운데 실시한 연합작전은 성공을 거뒀다.
다부동 전투를 통해 최초로 실시한 연합작전에서 국군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믿음과 신뢰라는 것이다. 서로 목숨을 담보로 맡기고 싸우는 전선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가운데 서로 믿을 수 있는 것은 강한 신뢰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맡고 있는 방어 지역을 무단이탈하거나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후퇴했을 때 차후 작전에서 정상적인 연합작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작전을 통해 깊이 깨달았다.
국군 1사단이 총반격 작전을 앞둔 1950년 9월 12일, 국군 사단으로는 최초로 미 1군단에 배속돼 북진작전을 할 수 있게 된 배경도 사실은 다부동 전투에서 보여 준 1사단의 전투수행 능력과 사단 전투력에 대한 미군 지휘관의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이 전투를 통해 작전 및 전투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숨겨진 재능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그가 6·25전쟁을 통해 ‘한국군 최고의 작전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치며 성장했던 것도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총명함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전의 근간인 한미 연합작전의 중요성을 전쟁 초기 가장 어려운 전황에서 그 누구보다 일찍 실전을 통해 체득한 결과였다.
■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다부동 전투-“내가 선두에 설테니 후퇴하면 나를 쏴라”
다부동 전투에서 한미 양국 군에게 서로의 신뢰를 깊이 심어 준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1950년 8월 21일 아침, 반격을 시작하기로 돼 있었는데 적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그때 11연대 1대대 병력이 벌써 적군에게 쫓겨 후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11연대와 인접해 있던 미 27연대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미 8군사령부에 “한국군이 후퇴해 퇴로가 차단당하게 됐다. 늦기 전에 우리도 철수하겠다”고 보고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잠시 후 미 8군사령부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 왔다. “도대체 한국군은 싸울 의지가 있는 군대냐”는 질책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나는 즉시 지프를 몰고 11연대 전방으로 나갔다. 보고는 사실이었다. 11연대 병사들은 축 처진 모습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김재명 1대대장을 불러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대대장인 그도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병사들이 밤낮없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쳤습니다. 거기다 보급이 끊겨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었습니다.” 지치고 허기진 병사들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앉아라.” 아무리 다급해도 병사들의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내 말 잘 들어라.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도 후퇴할 곳이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와 같이 싸우는 미군들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후퇴하다니, 이 무슨 꼴인가? 대한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나는 권총을 세워 들며 돌격명령을 내리고 장병들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우렁차게 함성을 지르며 내 뒤를 따랐다. 한번 기세가 오른 병사들은 거짓말처럼 용감했다. 어렵지 않게 고지를 탈환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이켈리스 대령은 나중에 내게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사단장이 직접 앞장서는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말했다.
당시 각 연대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한번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에서 우리 1사단이 일보를 제출하지 않아 이를 규명하겠다고 현장 확인을 하러 나온 일이 있었다. 중령을 반장으로 한 조사단이 사단사령부에 도착하자 사단에서는 15연대 전투 현장으로 안내했다. 행정 규정을 따지는 그들에게 해당 작전지역 대대장은 “직접 가 보시면 안다”고만 말하고 270고지 위로 안내했다.
그런데 고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자 조사단은 아무 말 없이 되돌아갔다. 그 후로는 육본에서 일보를 제출하라는 독촉이 없었다. 당시 사단의 각 연대에서는 신병이 도착하면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중대에 보충했다.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파악할 새가 없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심지어 중대장과 소대장도 자기 부대의 현재 병력이 몇 명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룻밤 격전을 치르고 나면 총원의 30~40%가 손실되고, 다음날 또 신병으로 교체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분대원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몰 병사들을 무명용사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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