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에 압도된 미국, 일본으로 철수계획 세워… 한국 군·경·가족 등 100만명 제주도 이전계획]
유엔군은 1·4 후퇴 위기를 넘기면서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자유진영 국가의 리더인 미국은 한반도에서 유엔군의 철수계획과 대한민국 정부의 제주도 이전계획까지 수립해 두고 중공군의 기도와 전선상황 변화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 참전 실체가 밝혀지면서 5억 인구에 500만명의 병력을 보유한 그들의 잠재력에 압도됐다. 또 소련이 그 뒤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전면전의 위험성에 대비하면서 새 전쟁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군은 당시 전선의 약 50㎞ 남쪽에 있는 금강선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있었다. 즉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경우 그 시기는 "중공군이 금강을 연하는 선에 진출하게 될 때"라고 판단했다.
1951년 1월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강압에 의한 철수 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전 대상 인원은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만6000명, 한국 육군 26만명, 경찰 5만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만명 등 총 100만명 정도였다.
정부의 위치는 제주도가 적지로 결정되었으나, 그곳에는 이미 25만명에 달하는 피난민과 포로가 수용되어 있고 식수가 부족하여 추가 수용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먼저 포로들을 근해도서로 이송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물론 맥아더 장군은 정부 이전 계획안의 검토과정에서 "한국인의 철수와 관련된 제반 문제는 유엔 회원국과 협의하에 결정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월초 유엔군 등 자유진영은 중공측에 휴전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17일 중공은 ▲선(先) 교섭, 교섭결과에 따른 휴전 ▲교섭시작과 동시 중국의 유엔가입 인정 등을 내걸며 사실상 자유진영의 제의를 거부했다.
이때 전선에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미 제8군이 위력수색을 실시한 결과, 중공군의 전력이 몹시 약해져 있어 유엔군이 즉각 반격에 돌입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전력이 소진돼 평택까지 진출할 능력도 더 이상 밀어붙일 힘도 없었다.
2월 1일 유엔총회는 압도적 지지로 베이징 정부를 '침략자'로 의결했다. 또 한반도 작전목적을 "침략자를 한국에서 축출한다"고 고쳐 잡았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