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47
일 자
2011.05.03 08:12:13
조회수
3524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8>
<18>소말리아 상록수부대 파병
[소말리아 땅을 옥토로… 한국군 첫 PKO `구호·재건 코리아' 과시 / 2011.05.03]

2011년 1월 21일 소말리아 북부 아덴만 해역에서 청해부대의 특수전 요원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했다는 소식에 국민 모두가 환호했다. 아프리카 대륙 동쪽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해상무역의 요충지에 위치한 해적의 나라 소말리아는 과거에도 우리나라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93년 7월, 252명의 공병대대가 파병됐던 나라인 것이다. 건군 이후 베트남과 걸프전 파병에 이은 세 번째 파병. 또한 한국이 1991년 9월 17일 유엔의 16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후 유엔의 깃발과 함께 참가한 최초의 평화유지활동(PKO·Peace Keeping Operation)이었다.

상록수부대 장병들이 유엔의 요청에 따라 모가디슈 북서부 지역에서 도로를 정비하고 있다
상록수부대가 설치한 사랑의 학교에서 한글을 공부하는 소말리아 어린이들

[생계 잃고 굶어죽는 주민 수두룩]
▲ 소말리아 정세 악화와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

영국과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소말리아가 독립을 쟁취한 것은 1960년 7월 1일이었다. 고대 소말리아는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지만 신생국가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부족 단위의 분쟁과 인접국 에티오피아와의 분쟁 때문이었다.

독립 이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1969년 10월 하메드시아드 바레 장군이 군사쿠데타로 집권,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역 단위 군벌들이 반정부 활동에 가세해 1991년 1월 바레 대통령을 축출했다.

바레 정부가 무너지자 소말리아는 군벌들의 각축장이 돼 버렸다. 그들의 싸움에 생계의 터전을 잃고 굶어 죽는 주민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1992년 4월, 유엔이 소말리아 구호활동을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그해 9월 다국적감시단 50명과 파키스탄 보병대대 500명이 파병됐다. 그러나 파벌들의 저항으로 구호활동은 불가능했다. 유엔이 보낸 구호품이 무장세력들에게 탈취되면서 1일 평균 3000여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1개월마다 전체 인구의 1% 정도가 굶어 죽는 실정이었다.

유엔은 질서 회복을 위한 군사작전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미국에 위임했다. 그에 따라 1992년 9월부터 연말까지 30여 개 국가에서 3500여 명을 파병, 다국적통합군(Unified Task Force)이 편성됐다. 그 후 통합군의 신속한 작전으로 1993년 5월까지 질서가 회복되면서 사태가 진정됐다.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유엔은 평화유지활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회원국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93년 7월 전후로 유럽과 이슬람권 국가들이 추가로 참가해 3만여 명의 평화유지군이 활동하게 됐다.

[`옥토로 만들겠다' 취지로 명명]
▲ 한국군 상록수부대 파병

1992년 9월 하순, 한국은 유엔으로부터 의료지원부대 파병 요청을 비공식으로 접수했다. 당시 한국은 유엔 회원국이 된 지 1년 남짓밖에 안 돼 PKO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유엔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어 그해 12월, 유엔 사무총장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공한을 보내 한국의 파병과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정부는 200만 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통합군의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1993년 2월 유엔은 또다시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정부는 앞서 두 번의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더 이상 명분이 없었다. 그때부터 정부는 파병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전투부대 파병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현지조사단을 보내 검토한 결과 건설공병 1개 대대를 파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사실을 유엔에 통보한 후 1993년 5월 18일 국회 동의를 얻었다.

파병부대는 경기도 안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189중건설공병대대를 모체로 각 부대에서 지원받아 252명으로 재편성하고 각종 장비를 보충해 파병준비를 서둘렀다.

부대 명칭은 소말리아 땅을 푸른 옥토로 바꾸겠다는 취지의 상록수부대(Evergreen Unit)로 명명했다. 이어 4주간의 교육 후 6월 23일에는 선발대, 7월 31일에는 본대를 각각 대한항공 민항기를 이용해 파병했다.

주둔지는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를 고려했지만 두 부족 간의 분쟁이 치열해 자칫 그들의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모가디슈 북방 30㎞ 지점의 발라드(Balad)를 선정했다. 그곳엔 소말리아의 사정에 밝은 이탈리아군 여단이 주둔하고 있어 그들로부터 경계를 제공받을 수 있고, 상호협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지역주민과 굳건한 유대 맺어]
▲ 상록수부대의 활동

상록수부대는 유엔이 요청한 모가디슈 서북쪽의 도로 보수에 착수했다. 이어 부가사업으로 주민들의 건의와 본국 합참의 승인을 받아 그들의 숙원사업인 관계수로를 보수해 주기로 했다. 1953년 이탈리아 민간업체가 건설한 수로는 토사 충적으로 인해 7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주민자치위원회가 경계를 제공한다는 협약을 체결하고 199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 이듬해 2월 말 준공식을 가졌다. 수로 개통으로 5000ha 규모의 경작지가 옥토로 바뀌게 되면서 소말리아인들의 자립의지를 심어줄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동안 내부의 분쟁 상황이 상록수부대에 속속 제보되는 등 지역 주민과 굳건한 유대를 갖게 됐다.

그 외에도 상록수부대는 지역 경찰서 보수공사, 사랑의 학교 및 기술학교 운영, 태권도 교육, 도서실 설치 등으로 소말리아인들에게 자립의지를 심어주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상록수부대는 지역 주민들까지 같은 편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며 극찬했다.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인정]
▲ 상록수부대의 철수 및 성과

상록수부대 파병 직전까지 안정을 찾아가던 소말리아 사태는 1993년 6월, 무장세력에 의해 파키스탄 병사가 살해되면서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파키스탄군이 무장세력을 공격하자 10월에는 미군 1개 중대가 습격을 받아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미국의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자 1994년 3월부터 미군 등 많은 국가들이 철수를 시작했다. 그 후 이슬람 국가를 중심으로 개편된 평화유지군이 계속 주둔했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무정부 상태로 남게 된 것이다.

상록수부대가 현지에서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우방국과 보조를 맞춰 철수를 결정했다. 무엇보다 상록수부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이 철수하면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유엔 및 관련 국가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상록수부대를 철수시킨 후에도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임을 설명하고 이해시켰다. 아울러 상록수부대가 보유했던 5억 달러 상당의 장비·물자를 유엔을 통해 기증, 소말리아 복구 및 재건에 활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록수부대는 1994년 3월 18일 서울공항을 통해 무사히 귀국했다.

비록 중도에 철수했지만 유엔 및 PKO 참가 국가들은 상록수부대를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인정했다. 그 결과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한국의 이미지를 고양하면서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다. 또 소말리아인에게 각종 인도적 구호활동과 재건사업을 펼쳐 한국의 얼을 심어준 것도 귀중한 성과였다. 이와 같이 한국군 최초의 PKO로 파병됐던 상록수부대의 모범적인 활동이 오늘날까지 세계 곳곳 한국군이 가는 곳마다 가장 우수한 평화유지군이라는 찬사를 받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9>
이전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