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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13: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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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4>
<14>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美 등 우방서 신뢰·지원 얻고 유입된 외화 `G20'도약 발판 군장비 현대화 등 전력 `UP' / 2011.04.05]

베트남 파병에 따라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국가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경제·사회발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
베트남 전쟁 이후 단절됐던 한-베트남 양국의 외교 복원을 위해 1992년 12월 22일 양국의 외무부 장관이 수교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국방 및 안보 분야를 넘어 우리나라의 현대사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61년 5월에 출범한 군사정부가 한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핵심적인 국가전략으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 파병을 빼놓을 경우 한국의 현대사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한 후부터 베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학술 차원의 연구도 흘러간 역사와 함께 묻혀 버렸다. 따라서 파병 50주년이 가까워지는 이 시점에서 그때의 파병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재조명해 보는 것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美 지원 국가발전으로 연계

▲ 정치·외교 및 대미(對美) 관계에 미친 영향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정부가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정부는 파병을 계기로 정치적 기반 구축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으로부터 신뢰와 지원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 위기설이 난무했던 1960년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며, 경제개발계획을 효과적으로 추진해 도약을 위한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또 미국과 안보동맹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미국의 지원을 국가발전으로 연계시킬 수 있었다. 1960년 초까지 우리나라의 안보는 물론 경제 및 사회 전반에서 미국의 지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한미 관계는 ‘상호 대등한 주권국가의 관계’라기보다 ‘미국이 주도하는 일방적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미국이 주도하던 한미 관계는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이 절실했기 때문에 한국이 요구하는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보장과 군사 및 경제원조를 적극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한미 관계’가 ‘상호 국익을 전제로 하는 협상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아울러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배경으로 자유 세계에서 발언권을 확대하면서 아시아 10개국이 참가하는 ‘아시아태평양각료회의(ASPAC)’를 창설하고, 주도하는 등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의 파병은 “비동맹 중립 노선을 추구하던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배척받는 계기가 됐으며, 박정희 정부의 장기 집권에 기여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주한미군 계속 주둔 보장

▲ 안보·국방에 미친 영향

1962년 북한의 김일성은 소위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고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베트남에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주한미군 2개 사단을 베트남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은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결행된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보장하면서,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원조로 장비 현대화 등 전력 증강의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가 1972년 M16 자동소총 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1977년부터 순차적으로 각종 화포를 양산할 수 있는 방위산업 체제를 갖추는 데 국군의 파병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또 파월 장병들의 전투 경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한국의 파병은 북한을 자극해 그들의 빈번한 도발을 불러왔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외화수입 총 50억 달러 추정

▲ 경제·사회에 미친 영향

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따라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국가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경제·사회발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유입된 외화를 부문별로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였다. 6·25전쟁이 마무리되면서 미국의 군사원조는 점차 감소하고 있었으나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다시 증가되기 시작했다. 전투부대가 파병됐던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추가로 제공된 미국의 군사원조를 추산하면 약 10억 달러 정도가 된다.

둘째, 미국 정부가 파병된 장병에게 지급한 수당, 대한(對韓) 물자구매, 기타 경비지출 등으로 국내에 유입된 외화를 약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셋째,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경제활동, 즉 용역 및 상품 수출 등 전쟁특수를 이용한 외화수입을 약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기타 선진국으로부터 한국에 제공된 차관(借款) 등과 함께 직·간접적인 경로로 유입된 외화의 경제적 효과를 2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따라서 국군의 파병에 따른 외화수입 총액은 50억 달러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큰 효과는 과잉투자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를 유입된 외화를 활용해 극복할 수 있었으며, 국내경기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정부 및 기업의 해외진출 경험을 활용해 차후 중동 진출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베트남 파병이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에 미친 영향과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결과 1964년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북한의 70% 수준(북한 153, 남한 103달러)에 불과했던 남한의 소득이 1969년엔 북한 194달러, 남한 210달러로 역전됐으며 1977년에는 남한이 1000달러를 돌파함으로써 북한의 2배에 가까운 소득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잃은 것도 많다. 특히 5000여 명의 전사망자와 1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오늘날까지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고엽제 환자 등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아울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소위 ‘베트남 양민학살’ 및 ‘용병’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상황과 여건을 명확히 이해하는 가운데,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1992년 수교 후 경제교류 지속

▲ 오늘날의 한국과 베트남

1992년 12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한국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수교(修交)에 합의한 후 양국은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활발한 교류를 계속해 왔다. 이어 양국 정상의 상호방문이 이어지면서 2009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제 양국의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는 더욱 긴요해지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의 경제발전 사례를 모델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한국의 경험과 기술, 그리고 투자가 절실한 형편이다. 또 한국은 베트남의 풍부한 원자재와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해 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이점을 제공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적 측면의 교류도 시작되고 있다. 베트남의 학생장교가 한국의 교육기관에 입교해 전략전술을 연구하고, 한국의 방위산업체가 베트남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두 나라의 상호 보완적 협력관계는 앞으로도 더욱 확대되고 긴요해질 것임이 틀림없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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