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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4: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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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08>
국난 극복사<8>고대 국가의 ‘천도’ 의미
[한국 지형 산악이 전 국토의 70% `천혜 요새' 외침 막고 내실 다져 / 2011.06.30]

한국은 지형상 산악지형이 전 국토의 70%나 된다. 전통 시대에는 곳곳에 있는 강이나 하천이 천연의 장애물로서 효과적인 군사방어 시설이었다. 이들을 관방(關防)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한반도의 지형적 조건은 외침을 저지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 수단이 됐다. 고대 국가에서는 수도를 정하거나 이전하는 문제가 지형적 요인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고구려 국내성의 북쪽 2.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환도산성과 산성의 서쪽은 칠성산이 험준한 봉우리들과 연결돼 천연방어물 역할을 하고 있는 사진
백제의 초기 수도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송파구 오륜동) 사진

고조선의 전략과 수도 이전

한국 역사의 최초 전투로 기록돼 있는 ‘대릉하 전투’는 연(燕)나라가 동진정책을 표방하며 교두보인 대릉하 일대를 확보하고자 일으킨 전쟁이다. 고조선은 천연 장애물인 대릉하와 의무려산맥을 장애물로 삼아 연군의 예봉을 차단하고자 했지만, 보병과 기병의 통합전술을 구사하는 대규모의 연군에 밀려 요동반도의 천산산맥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차적인 철수를 반복한 고조선은 결국 수도를 한반도 내륙의 안전지대인 평양으로 옮겼다.

요동지역은 고조선 방어에 긴요한 전략적 완충지역이었다. 연에 이어 다시 진(秦)나라가 침공해 왔을 땐 주민을 청천강 이남으로 이주시켜 북방의 공지(空地)를 활용하면서 후퇴전략을 구사했다.

가능한 한 주변국과의 충돌을 완충시키고 힘의 균열을 억제하면서 기회를 틈타 반격을 가해 원상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고조선의 생존전략이었다. 기원전 207년 중국에서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 진이 약화된 틈을 타 고조선이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요새들을 장악한 뒤 기세를 몰아 압록강 선을 회복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고구려의 천도 경위

삼국의 맹주인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부의 압록강 일대에서 성장했다. 고구려가 242년 요동군과 현도군의 공격을 막고자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인 서안평을 선제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244년 위의 관구검이 침공해 왔다. 관구검의 군대에 밀린 동천왕은 수도를 버리고 험준한 개마고원을 가로질러 황초령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대규모 전연(前燕) 군대가 342년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에도 환도성이 약탈됐고, 미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쳐졌다. 왕모와 왕비를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가 됐고, 여태껏 요동에서 얻은 모든 고구려의 영토를 상실했다.

결국 고구려는 천도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다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가 외침을 받아 임시 수도로 옮긴 것을 제외하면 고구려의 수도 이전은 사전의 계획된 천도였다. 그것은 외침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지만 안전하고 보다 나은 생산지를 위한 공간으로의 이동이었다. 한반도가 요동지역이나 대륙으로 열려 있는 한반도 이북의 지역보다는 천연의 지형이나 방어물이 드리워져 있어서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고구려가 남진해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한 것은 ‘수도의 안전’이 국가 경영의 중요한 요소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수세적인 선택이었다.

사실, 수도의 위치는 국가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그 위치를 결정하는 정도(定都)나 그 위치를 변경하는 천도(遷都)는 언제나 복잡한 정치문제와 연결됐다. 고구려는 유리왕 22년 때 최초의 수도인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했다. 졸본성은 협소해 도성 주민의 의식주 해결이 어려웠고 주변의 침략에도 쉽게 노출됐다. 그러나 태자 해명은 수도 이전에 반대했다. 그의 세력이 졸본의 기존 세력과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리왕은 태자에게 자결을 명하면서까지 천도를 관철시켰다. 국내성이 정복전쟁에 유리하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 영토와 백성을 확대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한 결단이었다.

그후 427년 장수왕이 다시 평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대동강 유역의 경제적 기반을 활용하고 고조선의 전통문화를 수용하며, 백제와 신라의 북진을 차단해 만주와 한반도 북방의 강국을 지향한다는 전략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러나 평양의 고구려는 상당 기간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지배질서 체제를 만들었지만, 그들의 고유한 수렵·유목적 습속에서 채득한 ‘야성’을 상실하고 정치적인 갈등과 내홍을 치르다가 결국 왕조의 몰락을 초래하고 말았다.

백제의 천도 경위

백제 역시 수도를 자주 옮겼다. 백제의 천도는 계획적인 천도보다 외압에 의한 ‘강요된 불가피한 선택’이 많았다. 최초 한성(漢城)에 수도를 건설했다가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그의 동생 여도(문주왕)가 위기를 수습해 웅진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웅진은 협소했고 천도도 임기응변적이어서 각종 토목공사가 요구됐다.

천도의 후유증은 민심의 이반과 왕권의 실추로 연결돼 정치적 불안이 가중됐다. 결국 백제는 불안한 정정의 혁신과 왕실의 내분을 종식시키고자 계획적인 천도를 추진했다. 538년 성왕은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마저 전대의 수도에서 겪은 암울한 상황을 반전시켜 새로운 왕권의 면모를 과시하는 데 얽매어 무리한 대외공세로 이어졌다. 그 결과, 전쟁의 피로로 인한 염전사상(廉戰思想)이 일었고, 성급한 성왕의 대외공세는 주변국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고립을 불러일으켰다. 잦은 천도는 내·외치의 불안정, 지도층의 염전사상, 왕권 강화를 위한 과도한 대외 강경노선 등이 겹치면서 통치의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비는 지형의 여건상 방어적인 측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백제는 최초 수도지역으로 선진적 철기문화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한때 찬연한 문화를 구가했지만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한 것이 국가발전의 제한 요소가 됐다. 신라와 연합해 회복한 듯했지만 결국 553년 신라에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신라는 한강을 장악해 경제적 생산력과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삼국의 각축전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라는 처음부터 내지 깊숙이 박힌 수도의 위치로 인해 오랜 기간 차분하게 주변국을 통합하는 경험을 축적하면서 내치를 다지는 가운데 후발국이었지만 끝내는 삼국 통합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삼국 통합의 직접적인 힘이 수도의 지형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신라 수도의 안정성이 신라로 하여금 삼국의 각축전에서 유리한 여건을 만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라는 통일 이후에도 천도하지 않아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은 “한반도의 북방을 확보하지 못한 점이 그에 기인한다”고 비판했다. 국가발전의 적극적 계기가 지역적 한계성에 묶인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었다.

수도 이전의 교훈

고대사회에서 수도는 지리적으로 외침으로부터 보다 안전한 곳이어야 했고, 정치·사회·문화의 발전에도 적합한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수도를 설정하는 ‘정도’도 어려웠지만 ‘천도’는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임기응변적인 천도는 결코 국가의 안녕과 발전에 긍정적이지 못하며, 계획적인 천도라 할지라도 천도 이후의 제반 결과를 충분히 예측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됐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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