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극복사 <6>고구려 최후와 평양성 함락
[연개소문 사후 내분 …항전 능력 급격히 상실 / 2011.06.16]
백제 왕조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고구려였다. 그런데 당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내비쳤다. 고구려 공략은 한시적인 ‘군사 공조’에 그칠 공산이 커 보였다.
당군의 공격을 받다
백제가 망하자(660) 그해 11월 당은 바로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당 원정군은 출발이 잠시 지체됐지만 661년 4월 육군과 수군을 합해 총 35군(17만여 명)이 참가한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했다. 작전에는 소정방 외에 방효태·유백영·조계숙 등 백제 원정에 참가했던 장수들이 대거 투입됐다.
소정방군이 먼저 대동강의 방어선을 뚫고 8월 평양성을 포위했다. 평양성이 농성하는 동안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을 압록강 전선으로 보냈다.
북쪽의 적을 저지해 남쪽과 연결을 끊어 소정방군을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처음엔 남생군이 잘 막았다. 그러나 음력 9월이 지나 얼어붙은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파죽지세로 돌진하는 당군 앞에 이내 무너졌다. 3만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남생은 겨우 목숨만 건졌다.
그 무렵 신라의 무열왕 김춘추가 서거하고, 661년 6월 태자 법민이 문무왕으로 즉위했다. 당 측은 신라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구려 원정을 지원하라고 압박했다.
신라군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7월 17일 지휘부를 편성하고, 옹산성(대덕 계족산성)의 백제 부흥군을 포위 공격해 점령했다. 그러나 충청지방에 병력을 집결한 채 북상 속도를 조절하며 정세를 관망했다. 신라로서는 그것이 최상의 방편이었다.
당군, 평양성 공략 실패
개전 6개월이 지나도록 평양성은 당군을 잘 막아냈다. 그때 당군에 갑작스러운 철군 명령이 하달됐다. 투르크 계통의 회흘(回紇)이 고구려 원정을 틈타 당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당의 토벌군은 회흘군을 격파했으나 추격전을 벌이다가 섬멸적 타격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원정의 주력군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흘군이 당을 침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연개소문이 회흘로 하여금 당에 저항하도록 노력한 외교적 성과였다. 당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회흘도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틈을 노렸고,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주력이 빠져나간 당군은 약했다.
662년 정월 연개소문은 사수에서 당군을 대파했다. 남하하던 방효태군은 전멸했다. 자신은 물론 13명의 아들과 휘하 군사 전원이 이국땅에서 주검이 됐다.
신라군의 군량 수송작전
평양성의 소정방군은 식량도 떨어진데다 폭설마저 내려 어려움이 가중됐다. 이제는 신라가 합류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난해 10월 말 이미 당의 사신이 경주로 와서 군수지원을 요청하며 동계작전의 의지를 분명히 했던 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량 보급작전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68세의 노장 김유신이 자원했다. 그는 2000량의 수레에 쌀 4000석과 벼 2만여 석을 싣고 북상 길에 올랐다. 1월 18일 풍수촌에서 길이 얼어 군량을 소와 말에 옮겨 실었다.
칠중하(적성 임진강)를 건너 이현을 지날 무렵 신라군은 고구려군을 만나 격파하며 2월 1일 장새(獐塞·서해 수안)에 도착했다. 눈보라 치는 몹시 추운 날씨로 동사자가 속출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름 그대로 ‘노루의 목’처럼 길고 좌우가 막힌 고개에 도착하자 수송부대는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사료에는 이때 칠순에 가까운 김유신이 웃통을 벗어부치고 스스로 채찍을 휘두르면서 몸소 마차의 뒤를 밀고 나갔다고 전한다. 당군 진영과 45㎞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김유신은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이 이끄는 15명의 특공대를 급파했다. 당군과 연결한 신라군이 드디어 고구려의 저지선을 뚫고 통로를 열었다. 2월 6일 양오(楊?)에서 군량이 전달됐고, 소정방에게는 은 5700분 등의 예물이 증여됐다. 그러나 군량을 받은 소정방은 662년 3월 병력을 철수시켰다. 회흘군 침공으로 당의 사정이 더 급했던 것이다. 허탈했지만 신라군은 그 능력을 여실히 입증해 보인 셈이었다.
고구려, 내분 일어나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에 내분이 일어났다. 장자인 연남생이 대막리지를 승계했지만 남건·남산과의 대립으로 골육상쟁이 벌어진 것이다. 국내성으로 탈출한 연남생은 아들 현성을 당에 급파해 지원을 요청했다. 당 고종은 그해 6월 남생 부자를 위로하고 관작을 내리며 당으로 불러들였다. 식읍 3000호를 받은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통치하다가 후일 46세(679)의 나이로 죽어 낙양의 북망산에 묻힌다.
그런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마저 심복 부하 24명과 함께 12개 읍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 조정은 연정토 일행을 후대했다. 고구려는 급격히 항전 능력을 상실했고, 나당연합군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나당연합군 재원정
666년 12월 당군이 다시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번에는 끝장내겠다고 작심한 듯 고구려 원정에 한 맺힌 80세의 이세적을 내세웠다. 667년 8월 73세의 김유신도 국왕과 함께 참전했다. 생에 마지막 출정이었다.
그러나 장새에 이르러 평양성 북쪽 200여 리까지 진출하던 당군이 철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5년 전 이곳에서 천신만고 끝에 마무리했던 수송작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신라로 귀환해야 했다.
667년 9월 막대한 전력의 당군도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겨우 신성(길림 무순 고이산성)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것도 고구려군의 사부구(師夫仇)가 성문을 열고 투항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세적의 주력부대가 북방의 16개 요충지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당군의 압박이 거세졌다. 남건이 역공을 가해 방동선 부대에 타격을 줬지만 역부족이었다. 당군은 국내성의 연남생군과도 합류했다.
668년 2월 당의 설인귀군이 부여성(길림 사평시)을 공략해 1만 명의 고구려군을 무력화시켰다.
연남건은 5만을 급파했으나 때가 늦어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연남건군은 설하수에서 당군을 만나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부여 지역의 40여 성이 단체로 항복했고, 주도권을 장악한 당군의 남진 속도가 빨라졌다. 목표는 평양성이었다.
수도 함락과 영욕의 군상
668년 7월 총사령관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이 먼저 평양성 외곽에 도착했다. 이어 당군이 도착하자 9월 21일 연합군은 포위망을 구축했다. 신라군은 성문을 격파하고 성 내부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고구려군도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포위망은 견고했다. 결국, 포위 1개월 만에 보장왕이 연남산 이하 98명의 지도자와 함께 백기를 들고 나와 항복했다.
남건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그러나 부하 신성(信誠)이 당 진영과 내통해 5일 후에 성문을 열었다. 끝까지 저항한 남건은 분개하며 자결을 시도했지만 생포됐다. 보장왕을 비롯해 20여만 명이 포로가 돼 당으로 압송됐다. 이로써 무강한 705년의 고구려 왕조가 막을 내렸다.
보장왕은 유배를 면하고 사면됐다. 그러나 677년 고구려 부흥군을 제압하는 임무를 받았다가 유민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사천성으로 유배(681)됐고 그 이듬해 사망했다. 그는 당의 이세적군에 멸망한 돌궐 왕 힐리가한의 무덤 옆에 묻혔다. 연남건은 사천성(장수현)에 유배됐고, 당에 협력한 남산은 남생처럼 관직을 받고 지내다가 63세(701)로 사망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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