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극복사<4>김춘추 ‘군사동맹’의 요체
[국제화·문화 외교로 `나당동맹' 결성 / 2011.06.02]
642년, 신라의 40여 성이 백제군의 수중에 떨어지던 그해, 신라는 절망의 나락에서 탈출구를 모색해야 했다. 바로 냉엄한 주변상황 하에서 ‘국제화’와 ‘문화 외교’를 요체로 한 ‘연합적 군사동맹’의 결성이 그것이다.
▶ 신라 위기 탈출의 시도
백제 의자왕(641∼660)이 친솔해 신라 40여 성을 점령한 뒤 그해 8월 고구려와 공모한 백제군은 당항성을 공략, 대당 통로를 끊으려 했다. 그리고 윤충의 1만 군사는 대야성(합천)을 점령해 신라의 서측을 위협했다.
이 전투에서 김춘추는 사위인 성주 품석과 딸(고타소랑)을 잃었다. 비보를 들은 그는 온종일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어 눈썹 한 번 까딱 않은 채 서서 사람이나 동물이 지나가도 몰랐다고 한다.
김춘추는 백제를 병탄할 결심을 하고 선덕여왕(632∼647)의 허락을 받아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평양으로 달려갔다. 연개소문을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뒤 오랫동안 백제와 동맹으로 신라를 공격하던 상황에서 상당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 김춘추 고구려로 떠나다
그가 떠나기 전, 김유신은 만일 두 달이 돼도 돌아오지 않으면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겠다고 했다.
비장한 각오로 고구려 땅을 밟은 김춘추에게 평양의 최고 권력자는 죽령 이북을 돌려주지 않는 한 원병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예기치 않은 제안에 김춘추가 “국가의 영토는 신하로서 어찌할 수 없다”고 하자 연개소문은 대노하며 그를 감금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지혜로웠다. 밀사를 보내 자신의 처지를 신라에 알리는 한편, 보장왕의 측근인 선도해(先道解)를 매수했다.
어느 날 선도해가 술을 한 병 가져와 용왕과 토끼의 간에 관한 고사를 들려 줬다. 지금도 ‘별주부전’으로 전해오는 설화다. 무슨 암시인지 알아 챈 김춘추는 바로 “원래 그 땅은 대국의 땅이었다”면서 귀국해 왕께 청해 돌려드리겠다고 써 보냈다.
한편 밀사의 보고를 받은 신라 조정은 긴장했다. 김유신이 결사대 1만 명으로 고구려의 남쪽 경계로 쳐들어갔다. 이를 안 연개소문도 김춘추를 풀어 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틈에 그는 무사히 탈출했다.
신라의 위기상황은 즉각 중국에 전해졌고, 그곳에서 수행 중이던 자장율사가 643년 3월 황급히 귀국했다. 여왕은 그의 건의대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 국운 융성을 빌었다.
▶ 신라 사신 당으로 파견
이제는 당이었다. 643년 9월 신라는 당에 원병을 청했다. 당시 정황으로 양국은 적에 대한 공통 인식은 있었지만 연합 행동을 취할 정도로 우호적이진 않았다.
당 태종은 신라를 위해 백제와 고구려를 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세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거란·말갈 등 당의 변방군으로 요동성을 쳐 고구려가 백제를 돕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라와 협동해 당의 군선으로 백제를 기습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당의 군복과 군기를 빌려 백제나 고구려에 대적하는 방법이었다.
또한 신라의 왕이 여성인 까닭에 업신여겨 침략을 당하고 있다며 당의 황족을 신라 국왕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른바 이 감국(監國)의 제안은 결국 뒤에 신라 조정의 분열을 일으켜 ‘비담의 난’을 유발하는 요인이 됐다.
신라는 644년 정월 또 사신을 보내 거듭 지원을 요청했다. 당은 현장(玄?)을 고구려로 보내 신라 침공을 즉각 중지할 것을 경고했다. 연개소문도 신라가 차지한 옛 땅과 성을 돌려보내라며 언성을 높였다.
당의 경고는 외교적 수사에 그쳤고 고구려의 압박은 계속됐다. 결국 당 태종은 자신의 중재 노력을 묵살한 고구려에 대해 645년 보복 침공을 단행했다. 신라도 3만 대군을 고구려의 후방(예성강)으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9월 안시성에서 당군이 패퇴했고, 신라의 위기감은 다시 고조됐다.
▶ 김춘추 마침내 당으로 향하다
신라가 출동한 틈을 타서 백제는 신라의 서부 7개 성을 습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대등 비담은 647년 취임 14개월 만에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고 트집을 잡아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이 가까스로 이를 진압하고 비담을 처형해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나 갑자기 여왕이 죽고 진덕여왕(647∼654)이 즉위해 정계의 주도권이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집중됐다. 그들은 과감한 정치 개혁과 함께 당과의 군사동맹을 추진했다.
우선 김춘추는 일본으로 가서 수개월간 체류하며 군사동맹을 이끌어 냈다. 고구려와 백제가 제휴하는 상황에 맞서 당을 우방으로 끌어들이려면 일본과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648년 1월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과 함께 당으로 갔다. 당 태종은 김춘추의 인물이 영특함을 보고 후히 대접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동맹카드’를 꺼내 들지 않았다.
그는 먼저 국학(國學)에 가서 공자에 대한 제사와 경전 강론을 참관했는데, 마음이 움직인 당 태종이 직접 쓴 온탕비·진사비와 새로 찬술한 진나라의 역사서를 줬다. 그때에야 당 태종과 한담하면서 백제를 물리칠 당군을 요청했다.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당 태종도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친 후에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동의했다.
나당동맹은 일종의 ‘문화 외교’의 성과였다.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을 비롯한 신라인의 숙위를 정례화했고 중국제도를 수용할 의사를 밝혔다. 당 태종은 진귀한 의복을 하사하면서 김춘추를 특진(特進)으로 삼고 그 아들은 좌무위장군으로 삼았다. 신라는 649년 중국 의관을 사용했고, 곧 ‘영휘’라는 연호도 사용했다. 신라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간파하고 신라의 국제화(중국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던 것이다.
혹자는 비밀협상 자체를 부정하거나 당이 표방한 천하질서를 전제로 한 불평등 관계였다고 비판하지만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국가의 실리다. 결국 신라와 당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했고, 신라는 8년에 걸친 당과의 대결 끝에 당군을 축출하고, 한반도를 통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사료에는 김춘추가 당에서 귀국할 때 고구려의 정찰대를 만나 죽을 위험을 겪은 일화가 전해진다. 김춘추에 대한 정보를 탐지한 고구려가 정찰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그때 화랑 출신의 부하 온군해(溫君解)가 즉시 김춘추의 옷으로 바꿔 입고 뱃머리로 나가 희생당함으로써 고구려군을 따돌려 종선으로 갈아탄 김춘추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동맹‘연합’ 실현 위한 지속 관리
당군의 출병은 당 태종의 죽음으로 바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라는 동맹관계의 지속적인 관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신 왕래를 계속했고, 진덕여왕은 태평송을 지어 비단에 수놓아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보내 당 고종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드디어 654년 김춘추가 52세의 나이에 무열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대당 외교를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655년 고구려군이 침공할 때부터 소규모지만 당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열왕은 당군이 서돌궐을 무찌르고 완승할 무렵인 659년 4월 또 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만 1년이 지난 660년 3월 마침내 당 고종은 소정방에게 백제 공격을 명령했다. 비록 무열왕 자신은 끝내 통일을 보지 못한 채 661년 6월 59세로 신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을 감았지만 이미 역사의 대전환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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