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극복사<1>국방과 외교 전략
[연개소문 `압박' 시달리고 `국방+외교' 의 성패 `대박' 터뜨리다 김춘추 / 2011.05.12]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교차하는 중간지대(rimland)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역사상 주변국으로부터 빈번한 `외침'이 있었다. 외침을 극복할 수 있는 최종 수단은 군사력이다. 그러나 국력에 의한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군사력 건설이나 운용이 제한되는 만큼 `자연적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대외관계가 중시됐던 것은 외교가 군사력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국방이었기 때문이다. 본지는 매주 목요일 우리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연재 한다.
고대의 전쟁 양상과 전술
고대 한국에서는 주로 청야전이나 산악 게릴라전을 펼치며 험준한 산 위에 산성을 쌓아 장기 농성전을 전개했다. 모든 민가와 양식을 불태운 뒤 산성으로 들어가 산악을 근거로 장기전을 수행했고, 밤에는 기습을 감행해 적군을 괴롭혔다.
이런 방식은 군사 수가 적어 정면 대결보다 대규모 적을 상대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적의 기마병은 평지에서 기동성이 강하고 위력적이었지만 산악전에는 취약했다. 반면 한국의 과하마(조랑말)는 산을 잘 탔고, 주 무기인 활은 아래로 쏠 때 명중률이 높았다. 산성으로 적들이 기어 올라오면 돌을 굴려 내리거나 돌팔매질을 하고 뜨거운 물도 퍼부을 수 있었다. 산성을 점령하려고 적들이 안간힘을 쓰면 정규군들은 적의 뒤에서 매복해 있다가 군량 보급선을 습격해 적의 공격력을 근원적으로 약화시키는 전술도 구사했다.
사실 대부분의 적들이 감당해야 할 적은 아군보다도 기아나 추위, 전염병 같은 전선 밖의 재앙이었다. 598년 6월 고구려를 침공한 수문제의 30만 대군도 장마와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612년 수양제가 100여만 명으로 재침할 땐 우기인 4월 이전에 속전속결을 꾀하다 도리어 고구려의 기만전술에 말려들어 살수에서 대패했다. 우리나라에서 ‘청야입보(淸野入堡)나 이일대로(以逸待勞)’와 같은 재래적인 전쟁 방식이 오랜 기간 전략적 방편으로 유용하게 활용됐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고대의 국제관계와 다원적 외교전
초기 국가인 고조선은 주변국에 대해 강·온 양면관계를 통한 생존전략을 견지했다.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한국 대외관계사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현상을 잘 드러낸다. 국가의 성장과정에서 인접국과 충돌이 잦았고 공간적으로 이격된 나라와는 그만큼 더 평화가 쉬웠다. 제(齊)나라, 부여, 숙신 등과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고조선이 연(燕)이나 진(秦)·한(漢)과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도 그런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요동(遼東)’은 전략적으로 완충지역(buffer zone)이 됐고, 해양지역은 주변국과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렇듯 ‘원교근공’은 일종의 ‘외교적 국방전략’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간 각축전에서는 주변국과 다중의 외교관계를 통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어 갔다. 위기 시에는 타협으로 ‘근교’인 상호동맹도 나타났다. 고구려의 남진에 위협을 느낀 백제가 433년 신라와 맺은 나제동맹과, 역으로 신라의 배반으로 642년 고구려와 맺은 여제동맹이 그것이다.
전성기의 고구려와 주변국
그런데 종종 ‘원교근공’ 정책은 인접국을 자극하는 직접적인 침략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330년께 고구려가 후조(後趙)와 연합해 전연(前燕)을 압박하려다 도리어 침공을 받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때 미천왕은 후조왕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 矢)을 선물하면서 고구려와 후조가 군사적 협조를 이루자는 징표로 삼았다. 그러나 양국 간의 우호관계는 성립시킬 수 있었으나 고국원왕 때 전연 모용황(慕容 )의 선제공격을 받아 고구려는 수도를 유린당하고 선왕인 미천왕의 묘가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환도성은 불탔고 5000여 명의 남녀 포로가 끌려갔다. 후조와의 협조가 이완됐고 인근 세력과의 대결에서 국제적인 협조가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다.
삼국시대의 `연합적 관계' 형성
외교는 삼국 간의 ‘힘의 균형’을 깬 결정적인 요인이다. 삼국 모두 외교를 중시했고 동맹에 의한 ‘연합적 관계’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지역 내 질서를 주도하는 핵심국가와의 연대가 국가 사활의 관건이었다. 적어도 7세기 중엽, 삼국 간에는 그레이트 파워인 당과의 동맹이 대외관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최대 변수였다. 세계제국을 꿈꾼 고구려로서는 원정으로 주변국을 복속시켜 나가던 당과 일시적인 화해는 가능했을지언정 애초에 동맹관계란 불가능했다. 당과의 동맹은 오직 백제와 신라에만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당과 일시적으로나마 화해를 유지했고, 충돌이 현실화된 국면에서는 당을 견제할 외곽세력인 돌궐과 연합하거나 설연타(薛延陀)가 오르도스(夏州)를 통과해 당의 측방을 공략하게 해 645년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백제 역시 수(隋)나 북조(北朝)와 관계를 유지했고, 당 왕조가 들어섰을 때는 무왕이 직접 과하마를 보내 외교를 맺으려 애썼다. 그러나 처음에 당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외교전이 끝이 보이지 않자 중재자적 입장에서 삼국을 조정하려 했다. 하지만 신라의 집요한 외교 공세로 북조와의 외교관계를 이용해 수나라를 위협한 적이 있는 백제를 제치고 결국 당은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 당과 신라 두 군데서 위협조건 만들어
당이 백제에 신라와의 화친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은 고구려와 합세해 신라의 40여 성을 공략함으로써 당과의 외교관계를 끝장냈다. 신라는 643년 선덕여왕이 사신을 보낸 이래 648년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당에 사신을 파견해 연합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혹자는 사대외교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민족 의식’의 형성 여부도 의심스럽거니와 외교가 실리를 무시한 이상의 무대일 수만은 없었다.
642년 8월, 김춘추는 백제군에 의해 신라의 서부 요충지인 대야성이 함락되자 그해 11월 적지인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대국의 위세를 과시하며 위압적으로 굴종시키려 했을 뿐 상황 판단을 잘못해 김춘추의 협상외교를 거절했다. 그는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 땅의 반환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660년대 동아시아의 격류에서 잠시 발을 뺄 마땅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채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세계제국 당이 고구려 복속을 포기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외교가 결코 잘못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신라에도 동일한 방식을 취해 결국 두 방향에서 위협 조건을 만든 것은 분명히 큰 실책이었다.
국방과 외교, 동전의 양면
국방과 외교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국방을 외교로 대치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만 위기 때에는 외교가 국방의 버팀목인 것도 사실이다. 국방과 외교의 적절한 배합으로 국가안보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외교가 주는 교훈이다. 신라는 648년 김춘추와 그의 아들 김문왕이 직접 구원외교에 나섰고, 마침내 660년 당의 출병을 성사시켰다.
신라로서는 고구려 외교의 실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고, 이로써 삼국 통합을 위한 전략적 우세를 점하게 됐던 것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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