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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08: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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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20>
<20>앙골라 공병부대 파병
[헐벗은 검은 대륙에 `블루오션 옷' 입히다 / 2011.05.24]

세계 에너지의 블랙홀(black hole)로 불리는 중국이 아프리카의 앙골라에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있다. 앙골라가 세계 10위권의 석유 생산국으로 자리매김하면서부터다. 앙골라는 석유·다이아몬드 등의 지하자원을 배경으로 최근 10년간 평균 11.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10.5%의 중국보다 빠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중심가로 부상한 앙골라는 경제성장에 비례해 국가의 자존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던 나라다. 그 시기에 한국의 공병대대가 유엔의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돼 그들을 지원했다.

제2의 도시 우암보에서 공항 배수로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
양측의 교전으로 파괴된 교량 복구공사에 땀 흘리는 장병들 모습

▲앙골라의 독립과 내전

앙골라(Republic of Angola)는 아프리카 서남부 대서양 연안에서 북으로 콩고민주공화국, 동으로 잠비아, 남으로 나미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5.5배인 125만㎢, 인구는 1800만 명이지만 평균 수명은 아직까지도 40세 내외로 세계의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는 나라다.

앙골라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5년 1월 31일, 3개의 독립운동 단체가 그들을 식민 지배하던 포르투갈과 과도정부를 수립하면서부터다. 인민해방운동당(MPLA)의 주도로 앙골라완전독립연합(UNITA)과 앙골라인민해방전선(FLNA)이 참여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그해 7월, 과도정부가 붕괴되면서 소련과 쿠바 등 공산권 국가의 지원을 받는 MPLA와 미국·중국·콩고(자이르)·남아공 등이 지원하는 UNITA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곧 미·소의 대리전으로 확대되면서 냉전 체제하의 이념대결 양상으로 비화됐다. 쿠바가 전투병력을 파병해 MPLA를 지원하는 가운데 미국과 주변국들이 UNITA를 지원했다. 그러나 1976년 11월, 미 의회가 UNITA에 대한 지원중지 법안을 가결시켰다. 그 사이에 정권을 장악한 MPLA는 세력을 더욱 확대했다. 1979년 9월, 산토스(현 대통령)가 MPLA의 지도자가 되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유엔과 국제사회는 쿠바군의 철수를 종용했다. 쿠바는 1988년 12월, 남아공이 UNITA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앙골라와 남아공 사이에 위치한 나미비아의 독립을 약속한다는 조건으로 철수에 합의했다. 유엔은 70명 규모의 제1차 앙골라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쿠바군의 철수를 확인했다.

그 시기에 있었던 탈냉전과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지켜 본 산토스 대통령은 1991년 4월, 공산주의 포기를 선언하고 다당제 도입을 약속했다. 국토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던 UNITA도 평화협상에 응해 선거에 의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유엔은 선거 감시를 위해 제2차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1992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MPLA의 산토스가 49%, UNITA의 사빔비가 40%를 획득했다. 그러나 사빔비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무력투쟁을 재개했다. 냉전이 종식되고 강대국과 주변국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분쟁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생산 지역을 장악한 정부군과 다이아몬드 생산 지역을 장악한 반군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은 UNITA에 대한 경제 재제를 결의한 후 중재에 나섰다. 양측을 오가는 유엔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3년 11월에 협상이 시작됐다. 마침내 1994년 11월, 양측은 정부의 주요 직위를 나눠 갖는다는 조건으로 제2차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19년간의 내전을 끝내는 계기가 마련됐다.

유엔은 평화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고 앙골라의 재건을 돕기 위해 1995년 2월, 제3차 진상조사단과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한국에는 공병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그 후에도 앙골라의 평화 정착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1997년 양측 공동으로 구성한 단일 거국내각이 출범하면서 UNITA 측 지도자인 사빔비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했음에도 그는 다시 반정부 투쟁을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생산 지역을 두고 정부군과 반군 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2002년 2월 22일, UNITA의 지도자 사빔비가 교전 중 사망했다. 이어 제3차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앙골라 내전은 27년 만에 비로소 멈추게 됐다.

앙골라는 1975년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인해 최소한 50만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이 종식된 후에도 주민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교전 지역에는 전체 인구 숫자와 비슷한 1500만 개의 지뢰가 매설돼 있어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주민들의 피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군 공병대대 파병 배경

앙골라에서 제2차 평화협정이 체결되던 1995년 2월, 유엔은 지뢰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 200명을 파병해 주도록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당시 한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앞두고 있어 유엔과 협력관계가 중요한 시기였다.

정부가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검토한 결과 지뢰제거 임무를 감당하기엔 제한 요인이 많았다. 조사단은 파괴된 교량건설 부대를 파병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며 관계자들을 설득해 동의를 얻었다. 이어 7월 15일에는 국회 동의를 얻었으며, 8월 7일에는 1113야전공병여단을 모체부대로 198명으로 편성된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식을 가졌다.

4주간의 준비훈련과 함께 8월 30일에는 장비와 물자를 부산항에서 선적하고, 10월 1일에는 선발대가 출국했다. 본대는 10월 4일 대한항공 전세기 편으로 서울공항에서 출국해 다음날 앙골라 수도 루안다 공항에 도착했다. 이어 유엔이 제공한 수송기와 차량을 이용해 동남부 내륙의 고지대에 위치한 우암보 지역으로 이동해 10월 말까지 주둔지를 건설하고 앙골라 재건사업에 나섰다.

▲파병부대의 활약 및 철수

유엔이 한국군 공병대대에 부여한 주 임무는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에서 제2의 도시 우암보를 경유, 남부의 루빙고를 잇는 주 도로상의 파괴된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도로 및 비행장 건설 등의 부가임무도 있었다.

주 임무인 교량 건설은 정부군과 반군 양측에 의해 파괴된 교량을 복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뢰 등 위험요소가 산재해 있어 난이도가 높은 공사였다. 이를 위해 공병대대는 특유의 성실성과 수준 높은 기술력을 발휘해 제1진과 제2진이 각각 4개소씩, 8개소의 교량을 성공적으로 개통시켰다. 부가임무는 주로 제3진이 담당했는데 비행장 복구 2개소, 수송시설 등 부지정리 5개소, 도로 신설 1.5㎞, 장비 및 기술지원 6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추가적인 대민지원 사업도 전개했다. 도로 보수 77.1㎞, 도로 신설 1.5㎞, 희망의 샘 설치, 방역 및 의료지원, 새마을 청소지원, 고아원·성당 보수, 사랑의 학교·태권도 학교 운영, 마을회관 보수, 구호활동, 영농법 설명회, 장비 지원 20회 등은 현지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업이었다. 아울러 공병대대는 유엔군사령부와 인접 파병 국가의 주요 간부를 초청해 친선 및 홍보행사와 한국의 날 행사 등으로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유엔이 부여한 임무와 대민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공병대대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귀국 길에 올라 1996년 12월 23일, 서울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1년 3개월에 걸친 앙골라 평화지원 임무를 완수했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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