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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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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정예강군으로 달려온 국군 53년 (국방일보)


제목 : 정예강군으로 달려온 국군 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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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실상부 세계6위 군사대국 성장 -

저자 : 전장새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수록 : 국방일보, 2000.10.02


c 국군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탄생되어 오늘로 건군 53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c 이 기간 동안 국군은 크게 5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현재는 군사력 60여 만명을 자랑하는 세계 제6위의 군사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국군의 발전 단계는 ①건군기, ②전쟁 및 정비기, ③국방체제정립기, ④자주국방기, ⑤국방태세발전기로 구분할 수 있다.
c건군기(1945-1950)는 1945년 8.15 해방으로부터 정부수립과 6.25전쟁 직전까지로, 이 기간은 미 군정이 창설한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이어져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군''으로 발족되어 국방제도를 체계화하였다.
c전쟁 및 정비기(1950-1961)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지휘체계를 전시체제로 개편하여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군사력 증강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유엔과 미국의 군사지원 획득에 노력하였다. 휴전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관인 연합참모본부를 창설하고 군비증강에 계속 주력하였다.
c국방체제정립기(1961-1971)에는 북한의 적극적인 도발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월남전 참전 등을 통해 시도된 군의 현대화 추진을 위해 방위산업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함으로써 국민총력전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자주국방기(1972-1989)에는 미국 일변도의 군사정책에서 벗어나 다변화정책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율곡사업에 의한 전력증강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국방목표를 설정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c국방태세발전기(1990년 이후)에는 21세기를 지향한 국방태세발전 방향을 수립하여 전략상황을 재판단하고 한국적 전략 및 전술을 발전시켜 전쟁억제에 기초한 군사전략 개념을 재정립해 나갔다. 그 결과 2001년부터는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추진하고 있는 선진 강군 육성의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될 ''신 국방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건군, 6.25전쟁, 전후 정비(整備) 시기

c해방 이후 미 군정하의 창군기로부터 시작하여 6.25전쟁을 거쳐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후,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에 의해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을 보인 1945년부터 1960년은 국군의 발전사(發展史)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국군의 초석을 다지는 기간이었다.
c이 때 국군은 오늘날의 육·해·공군 3군체제와 합동참모본부의 전신인 ''연합참모본부'' 창설로 현대적 군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창군 초기 치안위주의 국군 편제 및 장비에서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군원(軍援)에 힘입어 북한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군사체제로 전환되었다.
c국방부의 명칭도 군정시기 국방사령부에서 국내경비부로 개칭하였으나, 창군 주역들이 국내경비부 대신 대한제국(大韓帝國) 말 군대 편제에서 따온 ''통위부''(統衛部)가 정부수립 이전까지 사용되다가 정부수립 이후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육군은 남조선경비대에서 조선경비대에 이어 정부 수립후 육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해군은 해방병단(海防兵團)에서 조선해안경비대에 이어 정부수립과 함께 해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공군은 정부수립 1년 뒤인 1949년에 육군에서 분리하여 독립하였다.
c이 시기 좌익세력에 의한 무장폭동 및 군내 반란사건, 북한으로부터의 인민유격대 침투, 38선에서의 군·경 충돌 등 국기(國基)를 뒤흔들만한 대사건(大事件)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 사태에 직면하자, 공산세력의 발본색원을 위해 1948년 국가보안법과 국군기무사령부 전신인 방첩대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단행하였다. 숙군은 전쟁 이전까지 4회에 걸쳐 1300여명에 달하는 불순불자들을 색출함으로써 6.25 전쟁동안 군은 사상적 동요 없이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c6.25 전쟁은 창군된지 얼마 안되는 국군에게는 최악의 상황과 조건에서 사전 준비된 북한군으로부터 기습남침을 당한 전쟁이었다. 또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전쟁이었다. 3년 동안 지속된 전쟁에 25개국이 참가하여 혈전을 벌였다. 병력의 규모도 절정기에는 피·아 약 150만명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에 중공군은 연인원 500만명이, 미국은 약 180만명이 참전하였다. 피해도 한국군 62만명을 비롯하여 유엔군 16만명, 북한군 93만명, 중공군 100만명 등 총 300여만명의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승자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 정부에서는 1956년부터 한국전쟁시 38선 돌파를 기념하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c한국전쟁은 한국과 미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였고, 미국은 전쟁 이전의 소극적인 대한(對韓) 군사정책에서 야기된 6.25의 쓰라린 경험을 되살려 전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과 미국은 전쟁기의 혈맹관계를 발전시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동반자적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로써 한미연합방위치제가 더욱 공고히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c또한 국군의 전력구조를 독자적인 전투수행에 적합한 체제로 개편시켰다. 이에 육군은 최초 전방작전, 후방지원, 그리고 교육훈련 및 군수지원 체제인 1군사령부, 2군사령부, 교육총본부, 군수지원사령부체제로 개선·발전시켰고, 해·공군도 한국함대사령부와 전투비행단 창설을 통해 독자적 전투임무를 수행을 할 수 있는 현대적 군으로 나아갔다.

국방체제 정립 및 자주국방기

c1960년대는 월남파병과 북한의 노골적인 군사도발로 남북한간에 첨예한 군사적 대결 상태가 계속되었고,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때는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안보의 격동기로 고도의 국가정책과 국방전략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c1961년 5·16과 함께 전투력 증강에 총력을 경주하던 국군은 1964년 9월 월남정세가 악화되자, 미국과 월남정부의 공식 요청에 의해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여만명을 파병하여 소부대 작전활동을 포함하여 57만여회의 군사작전을 수행하면서 4650명의 파월 국군이 전사하였다. 월남전에 전투부대는 c1965년 10월 부터 전투부대인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 보병 제9사단 병력이 파견되었고, 절정기의 병력수준은 5만여명에 이르렀다.
c월남전을 통해 국군은 ''자유의 십자군''으로서 최초로 해외에 전투부대를 파견하여 국위를 선양하였고, 각종 작전활동을 통해 비정규전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현대전 수행개념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대부대 연합작전의 중요성도 인식하게 되었다. 또 월남 특수(特需)로 벌어들인 약 9억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국군의 현대화 추진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c1968년은 남북한간에 긴장이 최고로 고조된 시기였다. 북한은 청와대 기습,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알 수 있듯 한국에 명백한 군사도발을 감행해 왔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정부는 대간첩본부 설치, 예비군 창설, 그리고 1968년부터 시작된 국방각료회의(후에 안보협의회의)를 통한 예비군의 무장화, 장비의 현대화, M-16소총 생산 등에 합의를 봄으로써 군사력 증강 및 군 현대화와 국방체제정립에 노력하였다.
c1970년대는 주한미군의 감축과 미국의 무상군사원조 종료, 월남의 적화, 그리고 1977년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전면 철수선언 등으로 한국은 국방에서의 대미의존를 탈피하고, 자주국방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c1972년부터 국방부는 군사력 운영개념과 군사전략목표설정의 기본이 되는 국방목표를 제정하였다. 국방목표는 ①국방력을 정비·강화하여 평화통일을 뒷받침하고 국토와 민족을 수호한다. ②적정군사력을 유지하고 군의 정예화를 기한다. ③방위산업을 육성하여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한다. 이를 위해 군은 국방기구의 합리적 통합과 군 지휘체계의 공고화에 필요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또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1974년에는 율곡사업을 실시하였고, 1977년에는 자주국방의 핵심사업인 방위산업육성을 위한 ''방위산업 특별조치법 시행령''을 제정하고,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소화기로부터 해군 전투함에 이르기까지 각종 무기를 개발하여 방위력 증강에 기여하였다.
c1973년에는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철수에 때맞춰 제3야전군사령부 창설을 계기로 전 휴전선 경계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1976년에는 ''팀 스피리트''훈련을 최초로 실시하였고, 19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한·미연합방위태세 강화에 주력하였다.
c1980년대에는 북한의 계속된 테러와 도발에도 불구하고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력 증강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북한은 버마 아웅산 대통령 암살 폭파사건과 대한항공 납치사건 등을 간단없이 자행하였다. 그러나 군은 ''군사대비태세 강화'', ''방위산업육성'', ''적정수준의 군사력 건설'', ''정신전력 강화'', ''예비전력의 정비강화 및 동원태세 확립'' 등 국방정책의 기본방향을 정하고 이에 적극 대처해 나갔다. 제2차 율곡사업(''82-86) 기간동안 군은 ''88 한국형 전차''(K-1전차), 토우 대전차 미사일, 155밀리 자주포·다련장 로켓포, 한국형 구축함 등을 개발하여 실전 배치함으로써 자주국방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였다.

국방대비태세 발전기

c1990년대는 국력의 신장과 함께 국군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군은 한국적 전략 및 전술을 발전시키고, 고도의 전비태세로 전쟁억제를 가능케 할 군사전략 개념을 정립하였다.
c현대전이 요구하는 즉응성을 위해 합동참모본부 및 각군 본부의 조직을 육·해·공군 합동전략 발휘가 가능한 구조로 개편하였다. 육군은 전투의 효율성과 기동성이 향상된 전력구조로, 해군은 수상, 수중, 공중전력의 배비(配備)와 정비부대가 증강된 구조로, 공군은 고성능 신예 전투기 확보로 전투기능을 강화한 구조로 개선함으로써 새로 수립한 한국적 전략개념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c1993년부터 시작된 국제평화유지활동은 소말리아에 상록수 부대를 파견한데 이어 서부사하라, 인도·파키스탄, 앙골라, 그루지아, 동티모르 등 6개 지역에 총 2,300여명을 파견하여 치안 임무를 수행하였다. 현재는 동티모를 비롯한 4개 분쟁지역에 약 400여명이 평화유지 활동을 하고 있다. 평화유지 활동은 국군의 위상을 높이고, 다른 선진국가의 군인과의 근무를 통해 국제 매너를 익힘으로써 국제군으로서의 면모를 다져나갔다.
c1994년은 국군의 작전통제권에 커다란 변화가 있는 해(年)이었다. 국방부는 1994년 12월 1일을 기해 6.25전쟁 초기 유엔군에 넘겨준 작전통제권 중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을 44년만에 환수해 옴으로써 평시작전활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c1995년부터는 전투력 증강뿐만 아니라 군사외교 및 협력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1970년대부터 꾸준히 지속시켜 온 군사외교 다변화 정책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캐나다를 비롯하여 폴란드, 이스라엘,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러시아, 뉴질랜드, 호주 등과의 군사협력증진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 및 군사교류는 국제사회에서 평화유지활동과 함께 국군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c1996년에는 한·미간의 전통적인 군사유대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가운데 최초로 실시된 전시 대비 ''연합전시증원 연습''은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신속한 작전수행능력에 기여하였다. 1997년에는 국산지대공 미사일 ''천마'' 시범사격 성공에 이어 이듬 해에는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c이러한 ''한국적 전략의 발전'', ''방위력 증강'', ''한·미연합체제의 공고화'', ''군사외교의 다변화''는 북한의 군사도발 및 대결에서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8년 후방지역인 남해상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의 격침과 1999년 서해 연평 해전에서 해군의 승리였다. 국방에서의 자신감은 정부가 추진한 ''햇볕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급기야 남북정상회담과 국방장관회담으로 이어지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c이처럼 대북(對北) 우위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21세기 원년을 맞아 국방부가 추진하고 있는 ''21세기 신(新) 국방건설''은 통일 한국을 위한 ''선진 강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를 기초로, "기초가 튼튼하고 기본에 충실한 국방, 정보화·과학화된 선진정예 국방, 그리고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방"의 요체인 신 국방건설이 결실이 보게 된 날 우리 국군은 보다 성숙된 선진 국군으로 거듭 태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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