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시련과 극복
현재는 항상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 과거는 현재를 잉태하는 씨알이요 미래 또한 과거로 돌아갈 현재의 열매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50여년전 건국과 함께 호국의 동량으로 출발한 우리 군의 현재 모습 또한 결코 지난 국방사의 발자취와 무관하지
않다.
신생국의 간성으로서 우리 군은 ''''민족국가(nation state)''''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다시는 나라없는 설움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와신상담의 각오 아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 기초가 채 다져지기도 전에 국군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6·25전쟁
직전,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한국인 스스로가 국방력을 강화하도록 지원한다는 결정하에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국군은 전투병력이 고작 10만명도 못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무성의 정책기획실장 케난(G. Kennan)의 한반도 전략개념이나 웨드마이어(A. Wedmeyer)의 전략평가는 명백한
오판이었다. 개전 1년이 지나서야 전쟁은 캔사스선(Kansas Line)에서 작전상 진지전의 성격을 띤 제한전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전쟁의 값진 교훈을 통해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였다. 전우로서의 ''''혈맹''''은 한·미간의 결속을 강화시켰고
상호방위조약으로 양국은 공동방위의 결의를 다졌다. 2차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한반도에 왔던 미군은 세계적인 냉전하에서
자유진영의 전초기지를 사수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6·25전쟁을 치렀고, 전후에는 정전 당사국으로서 한국군의 전력증강(戰力增强)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힘겨웠던 전쟁''''은 한·미간에 깊은 우정과 연대감을 심어주었다.
새로운 시작과 도약
냉전구조가 심화되는 가운데 한·미관계는 그 결속의 정도가 더욱 굳건해졌다. ''''월남전의 미국화''''가 한창이었던 1960년대
후반기에 양국은 ''''파병과 지원''''을 통해 완전한 일체감 속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장도 국제군으로서 우리 군의
역할이나 실전경험에 의한 발전도 그러한 역사적인 계기에 힘입은 바 크다.
닉슨 독트린으로 시작된 ''''월남전의 월남화''''와 세계적인 데탕트 무우드는 우리 군에 시련과 동시에 ''''자주국방''''의 기회로
다가왔다. 우리 군이 민족의 생존을 위해 경제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추진한 이른바 1970년대 자주국방의 노력은 역사상
미증유의 일이었다. 조선조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직후에 도모한 국방체제의 재편과정에서도, 효종조에 이루어진 ''''북벌운동(北伐運動)''''의
과정에서도, 그리고 영·정조의 중흥기에 추진된 군사개혁의 성과도 이러하지는 못했다. 역사상 당대의 타국에 비해 우리
군이 선진화된 군대를 갖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삼국시대 이전의 몇 세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주변국, 특히 중국으로부터
선진군사기술을 도입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에 우리 군이 이룩한 자주국방의 결실은 오늘날 우리 군의 모형이자 기틀이 되었다. 당시 주한미군의 철수로
시작된 대외상황의 변화는 한편으로 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1976년 8월 18일,
주한미군의 철수를 유도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미군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북한은 세계인을 경악케 한 극적인 사건을
연출했다. 바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도끼만행사건''''이 그것이었다.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보니파스 대위
등 수 명이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의도와는 달리 세계적인 데탕트와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며,
북한이 의도하는 그 모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 인해 기정사실화 했던 ''''철군문제''''는 미국에서 이듬해 벽두부터 의회의 대논쟁으로 번져 찬반이 엇갈렸다. 근 30년전에
있었던 6·25 직전의 상황에서와는 달리 한국측의 제안은 주효했다. 결국 미국정부는 철군정책에 수정을 가했고 주한미군문제는
''''상징적인 철수''''로 종결되었다. 미국은 오히려 한반도의 현실적인 긴장과 위기상황을 인식하고 ''''한·미연합사령부''''라는
견고한 연합방위체제를 출범시켰다. 북한의 의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철군''''의 회오리바람을 일소하고 한반도 안전보장의
확고한 기틀을 다지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역사는 ''''중단없는 전진''''을 위해 노력하는 자의 편이었다.
자주국방의 실천과 평가
우리 정부와 군이 1970년대에 이룩한 역사상의 업적은 오늘 21세기의 국방을 전망해보는 데에도 큰 의미를 시사해준다.
뿌리없는 꽃이 없듯이, 지난날 국군의 발전사는 성년으로 성장한 오늘 우리 군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주한미군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북한의 도발이 가중되는 가운데 고도의 한·미연합방위를 완성시키는 한편 국가보위의 사명을 다하고자
''''70년대초에 설정한 ''''국방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 군이, 국방정책 구현체계의 정립, 국군 현대화를 통한 전력증강과
국방기획관리 및 전략기획의 모색, 나아가 독자적인 전쟁수행능력의 확충 등을 소위 군시(軍是)로 삼아,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각군에서 추진함으로써 조선시대의 ''''북벌운동''''에 비견할 만한 민족사의 주체적인 ''''승전운동(勝戰運動)''''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위기관리능력
우선, 월남파병에 따른 힘의 공백을 노리고 자행한 북한의 지속된 도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우리 군의 위기관리능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1·21 청와대기습사건이라든지 울진·삼척사건, 8·15 대통령저격사건, 8·18
도끼만행사건, 지하땅굴 굴착사건 등 수많은 대남도발에 국군은 즉각 대응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특히, 1975년 4월
30년간의 월남전이 공산화로 종지부를 찍자 이에 고무된 김일성이 남침협의차 북경을 방문함으로써 조성된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위기상황도 군은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국군은 주한미군과 함께 ''''9일전략''''을 대내외에 천명하면서 대처하여 북한의
예봉을 사전에 꺾어 그들의 ''''헛된 망상''''을 잠재웠던 것이다. 그후 한·미 양국은 1978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여 확고한 연합방위체제를 이루어 고도의 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국군의 위기관리능력은 이러한 여건하에서 국민의 참여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총화(總和)'''' 정신에 힙입어 국방정책과
군작전을 책임있게 수행한 국방부와 합참의 조화로운 협력의 결과였다. 동시에 월남에서 철수한 주월군을 모체로 3군을
창설하여, 기존의 1군과 2군에다 실전경험을 갖춘 야전부대를 최전선에 배치함으로써 방어력을 극대화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군이 자체 능력으로 전 전선의 방어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최초의 주한미군이 1949년 6월부로 철수를
마친 이래 실로 24년만의 일이었다.
·국방현대화와 전력증강
국가의 경제발전에 힘입어 기간 중에 추진했던 국방현대화(國防現代化)를 위한 연구개발(R&D)과 방위산업의 육성으로
이룩한 전력증강은 현대한국 국방사의 한 획을 획기적인 족적이었다. 1966년 한·미간에 작성된 ''''브라운각서''''에 따른
군원과 장비지원의 토대 위에서 조상들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계승한 1974년부터 시작된 ''''율곡사업(栗谷事業)''''의 성과는
말할 것 없고, 국가의 경제개발계획에 동참하여 ''''경제적인 군운용''''이라는 차원에서 전개했던 국방기획관리(PPBS)와
국방중장기계획의 수립·추진, 그리고 국방조직의 편제 조정 등이 그러하다.
민족사의 각 시대마다 거론되던 국방의 주된 과제가 이 시기에 한꺼번에 완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방무기의
자체 생산체계를 갖추기 위한 연구개발과 성과 또한 개인화기를 비롯해 한국형 전차(M48A3∼5)나 헬기(500MD)의
양산과 유도탄(백곰) 개발로 나타났다. 전력증강에 의한 국군의 전투력은 오늘날 ''''국제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선진군의 위용을 갖추게 한 힘이 되었다고 하겠다.
·국방정보화의 길
최근에 들어서 보다 중시되고 있지만, 군의 현대화에 있어서 정보화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듯하다. 월남이
패망한 직후 우리 군은 유형전력 외에 정신전력과 같은 무형전력을 강화한 이른바 ''''사상군대(思想軍隊, army in
morale)''''로서의 면모도 크게 일신하였다. 전투력의 원천이 전사의 ''''전투의지''''에 기초한다는 확신속에서 국군은 유·무형
전력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 군은 무형전력을 한 차원 높여 고도의 전략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인식과 실천으로 나아갔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구에 회자하던 ''''지피지기(知彼知己)''''의 군사원리가 ''''정신''''과 ''''정보''''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 결과 국군의 독자적인 전쟁수행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노력은 전략기획과 ''''태극72계획'''' 등 전략적 수준에서 전투대비태세를
다지는 상승 전략군으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동시에 군정보화의 단초를 열었다. 현대전의 특징인 조기대응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보수집체계의 구축은 바야흐로 최첨단의 ''''조기경보체제''''로의 전망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전자정부를 구현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부응하면서 우리 군은 정보화의 방향을, 효율적인 국방정책의 구현은 물론 전쟁의 최대억지력을 보장하기
위한 ''''C4ISR체제''''와 같은 전자전에 대비한 미래의 국방전력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어 그 큰 성과가 기대된다.
국방·군사외교의 다변화 추구
이러한 과정에서 국군은 우리의 국방에 영향을 주었던 주변국, 특히 미국을 비롯한 주요 관련국과의 긴밀한 군사외교에서
오늘날 국제화 시대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의식은 국제적으로 행동은 민족적으로!''''
이것이 현대 국방사를 통해 우리 군이 배울 수 있는 군사외교상의 교훈이다. 우리 군사외교의 축은 미국이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대외관계에서 특정국 일변도의
군사동맹관계가 점차 주변국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는 현실적 상황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에 지역안보를 위한 주변국과의
군사적 교류와 협력이 지역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로 제시되리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일고 있다.
우리는 현대 국방사, 특히 ''''70년대 국군의 발자취에서 6·25전쟁과 월남전의 교훈, 그리고 국가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의 노정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 우리 앞에는 국방정책과 전략기획의 통합적 운용, 미래전에 대비한 정보화
지향, 그리고 효울적인 연합방위전략에 따른 군사대비태세의 유지와 제병합동작전능력의 심화 등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우리 군은 불확실성의 시대로 예측되고 있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현대 국방사가 주는 교훈을 바탕으로
''''21세기 신국방''''을 완벽하게 구현함으로써 민족의 발전을 위한 자주국방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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