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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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38선의 전 전선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불과 3일만에 수도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서 붕괴되었다. 지리멸렬(支離滅裂)된 국군과 7월 5일 황급히 참전한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겨우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초기작전의 결과만으로 볼 때는 북한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와 같이 ''초기작전에서 북한군이 일방적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종횡무진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한군의 치밀한 남침준비와 전투력의 우세를 들 수 있으나, 그 보다는 우리의 전쟁대비 태세와 용병술(用兵術)의 과오가 컸었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과오의 첫 번째는 북한군에 대한 정보의 부재였다. 초기작전시 북한군이 달성한 기습은 그들의 남침이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아군의 잘못에 의해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북한군의 남침기도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계속 경고되고 있었으며,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한인계 사단의 전환과 소련으로부터 다량의 전차를 도입하는 등 공세위주의 전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기습을 허용하게 된 것은 38선에서의 잦은 무장충돌과 함께 각 지역에서 발생한 무장봉기 등으로 인하여 수시로 발령한 비상경계태세가 오히려 위기의식을 둔화시킨 데도 원인이 있었다. 두 번째 문제는 국가방위를 위한 전략과 용병술의 부재였다. 정부수립이후 남한의 가장 큰 과제는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방태세를 확립하는 것''이었음은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전쟁지도부는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인 대비책을 강구하는데는 소홀하였다. 당시 "나라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할 때 대규모의 군비 증강이 어려웠다"는 사실에도 공감하지만, 북한의 예상기도를 분석하여 남침대비 전략을 수립하고, 전차·화포 등 북한의 공세적인 전투력을 고려하여 방어방책을 강구하는 등 최소한의 조치마저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일선 사단에서는 빈약한 자원을 총동원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수색정찰과 부단한 훈련으로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 사례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어디까지나 전술적 수준의 조치에 불과하였다. 이 때문에 초기작전시 국군은 북한군이 앞을 세워 공격하는 242대의 전차를 앞에 두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만 했다. 세 번째는 한강교의 조기폭파로 인한 서울시민의 피해와 국군주력의 붕괴를 들 수 있다. 남한의 전쟁지도부는 북한의 남침이후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6월 27일 심야에 서울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어서 28일 01시에 북한군의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는 사실만으로 150만 서울 시민과 한강이북에서 전투중인 국군 주력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28일 02시 30분에 한강교를 폭파해 버린 것이다. 이로써 150만 서울시민과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 갇힌 채로 붕괴되고 말았다. 반면에 국군은 주력이 초기 3일간의 작전에서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방위의 의무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강을 건너 철수해 오는 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맨주먹으로 북한군과
맞섰다. 이 결과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의 5일간은 전쟁의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붕괴되었던 국군 부대들이 이 시간을 이용하여 재편성하고 부대를 수습하여
지연전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유엔군 참전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