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89
일 자
2011.08.18 09:10:04
조회수
332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5>
<15>김유신과 삼국통일
[뛰어난 정보전+공명정대한 행동+至誠 多갖춰 / 2011.08.18]

국가보위 고삐 죄고 삼국통일 말달리다

경주 황성공원 내에 위치한 높이 16m의 김유신 장군의 동상 사진
김유신 장군릉 사진(자료=경주시청 홈페이지)

654년 무열왕이 즉위하자 김유신의 지위도 확고해졌다. 660년 그는 상대등에 올라 정치·군사 양면에서 왕을 보필했다. 신라는 당(唐)과의 우호관계를 한층 강화했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선 공세로 급선회했다. 이제 `국가보위'의 전쟁은 `삼국통일'의 전쟁으로 변했다. 이 역사의 정점에서 김유신은 노구를 이끌고 최고 지휘관인 대총관으로서 전선을 누볐다.

정보전 구사의 용병술

655년 9월 61세의 김유신은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때 정보전으로 군사적인 수완을 발휘한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백제에는 좌평 임자(任子)의 집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미갑이란 자가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김유신이 임자와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게 해주자 조미갑은 충성을 다했다. 그가 임자에게 입수한 정보는 백제 원정에 긴요한 자료가 됐다.

660년 5월 26일 마침내 5만의 신라군이 백제 원정 길에 올랐다. 접근로는 신라가 최후까지 유지한 무주를 거쳐 탄현과 황산벌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이미 영동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이제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들어갈 차례다. 이곳은 험지였다. 신라가 이 험지를 통과하리라는 점을 간과한 백제였지만 계백군이 먼저 황산벌로 가 진지를 선점했다. 5000 계백 결사대의 처절한 저항으로 일시 주춤했지만 8월 18일 신라군은 의장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공로로 김유신은 대각간에 올랐다.

공명정대한 행동철학

660년 여름 신라가 백제를 공략할 때다. 김인문이 당에 들어가 소정방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이르렀다. 기벌포로 들어올 때 해안이 진흙벌이라 버드나무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상륙시켰다. 백제가 멸망한 후 소정방이 이 일을 상기하며 김유신ㆍ김인문ㆍ양도 세 사람에게 백제의 땅을 식읍으로 주고자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거절했다. 온 나라의 기쁨이지 자신들만이 상을 받는 일은 의리상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군은 신라를 점령할 의도를 내비쳤다. 이를 안 신라 측은 대책회의를 열었다. 다미공(多美公)이 신라인을 백제인처럼 옷 입혀 반역하면 당군이 반드시 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김유신이 동의하고 당과 일전하려 할 때 왕이 만류했다. 그는 답했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인데 어찌 어려움을 당해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리요?”

김유신은 신중했다. 그러나 불의한 경우에는 과감하고 당당하게 실력을 보여줘 상대방의 저의를 포기하게 만드는 용기와 담력이 있었다. 소정방은 신라를 치지 못하고 그해 9월 3일 의자왕과 1만여 백제인을 압송해 귀국했다.

당 황제가 신라를 왜 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어진 임금, 충성스런 신하, 부형처럼 섬기는 백성들로 이뤄진 신라는 작지만 도모할 수 없는 나라다’라고 말했다 한다.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최후의 공격이 있기 직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새가 당군 진영 위를 날아다녔다. 불길하다 여겨 점을 치니 당군 사령관이 상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러자 소정방이 두려워하며 철군하려 했다. 이에 김유신은 “어찌 나는 새를 괴이한 일로 여겨 천시를 어긴단 말이오”라며 검을 뽑아 새를 겨누니 그 새의 몸뚱이가 찢겨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이 심기일전해 백강의 왼쪽 언덕에 진을 쳐 전투에 임했다는 것이다.

‘지성(至誠)’의 자세

김유신은 인간의 힘만을 믿지 않고 최선의 준비를 갖추고도 신령께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드린 ‘지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661년 봄 이찬 품일 등을 대동하고 백제의 잔당을 제거하려 할 때다. 고구려와 말갈군이 북한산성을 포위했다. 이에 김유신은 “사람의 힘을 다했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절에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했다. 그때 천둥과 벼락이 적진에 떨어져 적군이 성의 포위를 풀었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첩자까지 감동시킨 얘기가 전한다. 어느 날 김유신이 대문 앞을 거닐 때 어떤 이가 다가왔다. 그가 고구려의 첩자임을 즉시 알아챈 김유신은 신라의 화평지세를 설명하고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임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감동을 받은 첩자는 귀국해 신라에 대한 무력행위를 강력히 만류했다고 한다.

661년 6월 무열왕이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김유신에게 큰 충격이었다. 평생의 반려나 다름없는 그였기 때문이다. 문희 소생의 장남 법민(法敏)이 문무왕으로 즉위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영특한 용모에 지략을 갖춘 왕은 일찍이 진덕여왕이 수놓은 ‘태평송’을 갖고 당에 간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벌떼처럼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진압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아직 상중이었지만 당이 고구려 원정을 통보해 왔다. 문무왕은 김유신을 위시한 많은 병사를 데리고 직접 고구려로 향했다. 도중에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인 옹산성을 함락시켰다. 그 무렵 평양의 소정방군이 군량미를 요청해 왔다. 적진에 있는 신라군으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김유신이 나섰다. “신이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국사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겠나이다.”

김유신은 현고잠의 동굴 안 절에서 재계했다. 그는 영실(靈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분향하며 여러 날을 지새우고 나와 소임에 확신을 가졌다. 악전고투 끝에 662년 2월의 그는 군량 수송작전을 완수했다. 그가 ‘지성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의 절정을 향해

663년 여름 백제 부흥군이 최후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김유신도 출동했다. 신라군은 당군과 연합해 주류성과 임존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664년 정월 70세가 된 김유신은 현직에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문무왕이 궤장을 하사하며 머물기를 극구 간청했다. 667년 8월 고구려 원정에 착수할 때 다시 친정하는 왕을 따라 출정했다. 그해 11월, 신라군은 5년 전과 같이 장새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그곳에서 평양성 200여 리까지 진출한 당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것이 마지막 출전이었다. 이듬해 74세의 김유신은 고구려 원정군의 대당(大幢) 대총관에 임명됐지만 풍병으로 출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667년 평양성이 함락됐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삼국통합이 일단 이뤄졌다. 문제는 당군이었다.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을 축출하고자 했다.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무려 7년간에 걸친 대접전의 시작이었다. 김유신은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3년 7월 1일 79세로 죽었다. 임종 직전에 ‘요상한 별’이 나타나고 지진이 일어나자 그는 그것이 국가의 재앙이 아니라 자신의 재앙이라며 걱정하는 대왕을 위로했다.

‘삼국사기’에는 여름 6월, 수십 명의 군복 입은 이들이 유신의 집에서 울며 떠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전한다. 김유신은 음병(陰兵)이 자신을 떠나 복이 다했으므로 곧 죽을 것이라 했다. 10여 일 후 그는 병으로 누웠다. 조카 문무왕이 위문하는 자리에서 수성을 위한 간곡한 진언이 있었다. 왕은 울면서 대장군의 유언을 받들었다. 150여 년 후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했다. 김유신은 문무왕과 함께 신라를 지키는 두 신 가운데 하나로 흠앙됐다. 이로써 그의 혼백이 무덤에 머물며 국가를 진호한다는 고사가 널리 퍼졌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33>
이전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