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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4 08: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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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3>
<13>신라의 사회 이념
[승려들 `충효+불가의 道' 일체화 / 2011.08.04]

호국정신 근간 삼고 삼국통일 대업 이뤄

황룡사 9층목탑 터와 탑 중심을 지탱해 주던 심초석 사진(왼쪽)/삼국유사의 만파식적 기사 사진(오른쪽)

7세기의 한반도는 삼국 간 갈등이 격화되고 밖으로는 수와 당의 팽창정책으로 외침이 계속된 국가적 전란기요 시대적 격변기였다. 그 시대 신라의 승려들은 충효와 불가의 도를 일체화시켜 호국정신의 근간으로 삼아 청년 화랑을 일깨웠다. 사회적 이념과 호국정신이 합치된 그들의 신앙은 삼국통일의 국민적 총화를 이루는 정신적 기반이었다.

유·불의 사상적 묘합

신라는 고대국가 가운데 그 어느 나라보다 상무정신과 호국정신을 사회적 이념과 가치로 승화시킨 나라였다. 빈번한 전쟁은 충효의 정신이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도덕으로나 국가사회의 행동 원리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충효사상을 국가운영의 원리로 삼은 신라는 한(漢) 문화(유교)를 수용해 실천적 규범으로 제정하고 민중 교화의 과정을 통합시켰다. 내물왕 때 물계자(勿稽子)는 전형적인 충효의 상징 인물이었고, 원광법사가 귀산과 취항에게 내려준 세속오계는 충효와 종교적 가치가 합치된 실천규범이었다.

또한 청년 화랑들이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서약을 적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신라 청년들의 충(忠) 의식과 생사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충성은 멸사봉공의 행동으로 나타났고 순국ㆍ보국의 정신으로 표출됐다.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타난 69명의 인물 중에서 28명(41%)이 충효의 표상이었음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특히 신라 사회에서는 충효의 사상이 불교와 접합하면서 신라인의 국가관과 생사관에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불경과 경문을 수용하고 보급해 국가적으로 불교와 유교를 융합시켰다. 이렇듯 유교의 왕도정치와 불교의 호국관이 공존하는 가운데 충효사상은 6세기 경 화랑도의 공인을 이끌어 낸 이념적 기반이 됐다. 이와 동시에 호국정신이 불교와 깊은 관련 속에서 국가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불교는 귀족들의 반대 속에서 100여 년의 박해 끝에 결국 왕실을 통해 수용돼 국가의 융성을 기원하는 국교로 성장했다. 당시 사찰은 산간이 아니라 주로 수도나 도시에 건립돼 호국불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호국이란 본래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준말로 안팎의 난에서 국가를 지킨다는 뜻이다. 신라인의 호국정신은 불교적 가치 속에서 내면화됐다. 그 뚜렷한 증좌가 이른바 ‘호국신보’(護國神寶)와 ‘호국신성’(護國神聖)의 존재다. 이것이 사회를 통합하고 구성원의 공동체적 결집력을 더욱 굳건히 했으며, 호국안민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신라를 수호하고 모든 재앙을 물리쳐 준다는 믿음과 함께 신라인의 호국정신을 심화시켰다.

호국신보와 호국신성

신라 사회에서 호국신보와 호국신성은 호국불교를 현실적으로 체현하는 호국신앙의 대상이었다. 신라인들은 신라 특유의 신앙을 확립하고 불교를 통해 사회를 통합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국통일의 정신적 토대로 삼았다.

호국삼보란 황룡사 장육존상과 구층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말한다. 황룡사의 장육존상은 진흥왕 35년(574)에 주성했다. 신라 불교의 뛰어남과 신라 본위의 불국토 사상을 상징하고 있는 진신불적 존상으로서 신라인에게 호국의 보배로 신앙의 대상이 됐다. 황룡사의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645)에 착공해 그 이듬해에 완성을 보았다. 백제 침공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김춘추가 고구려로 원병을 청하러 떠날 무렵, 당으로부터 긴급히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로 세워진 탑이다. 자장이 중국의 태화지 용신(龍神)으로부터 탑을 세워 국가를 이롭게 하라는 얘기를 듣고 귀국해 조정에 건의했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뒤 삼국통일이 됐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구층탑의 영응(靈應)으로 통일대업이 이뤄진 것이라 믿었다.

황룡사 9층목탑터와 심초석

특히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해 낙성한 구층탑은 당시 치열한 삼국의 전쟁에서 신라가 인접국의 항복을 받고 삼국을 통일해 영원할 것을 희구하고 기원하며 세운 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승리와 통일을 위한 국민총화의 상징이었고, 225척의 구층탑은 당시 단층건물뿐인 신라의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 통일의 의지와 열망을 절실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천사옥대는 진평왕 원년(579)에 천사가 대궐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천제의 심부름으로 옥대를 전했으므로 왕이 무릎을 꿇고 받자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때부터 교묘대사(郊廟大祀)에 이 옥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천제가 진평왕에게 내려준 옥대는 제왕의 권위와 존엄성을 상징하며, 석제천제(釋帝天帝)는 물론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과 일체선신(一切善神)이 항상 신라의 왕좌와 국가를 옹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불교적이면서도 호국적인 신라 정신세계의 표상이다.

통일 후, 호국삼보의 존재성이 약화된 대신에 호국의 이성(二聖)과 만파식적(萬波息笛)이 통일 전성기 신라의 새로운 호국신보가 됐다. 호국의 이성이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문무왕의 사후신인 동해대룡(東海大龍)과 김유신(庾信)이 하늘에 태어났다는 천신(天神)의 두 호국신령을 가리킨다. 두 신은 동덕동심(同德同心)으로 신문왕 2년(682) 5월에 감은사 앞바다에 떠다닌 조그만 부산(浮山)을 통해 호국의 큰 보물을 내놓았다는 만파식적의 설화에 등장하고 있다.

호국이성은 문무왕과 김유신이 이룩한 통일대업을 감사하고 그 공적을 기리고자 하는 민심의 작용이었으며, 그들의 유덕을 흠앙하는 국가적 찬양의 표현이었다. 호국의 두 신 중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맏아들인 김법민이다. 신라인들은 그가 호국룡이 됐다고 믿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죽어 동해의 용으로 화현(化現)했고, 그래서 문무왕의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에 이견대(利見臺)가 있고, 감은사에는 용이 머물 수 있도록 금당(金堂)의 섬돌 밑에 굴을 파놓았다. 김유신 또한 33천의 하나로 신라에 내려왔다고 믿었다. 33천은 호법호세(護法護世)의 선신(善神) 천제석(天帝釋)이 사는 도리천을 가리키며, 그러한 하늘의 천신이 된 김유신이었으니 호법호국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기사

‘삼국유사’는 ‘만파식적’의 설화를 전한다. 설화에 의하면, 감은사 앞 동해 바다에 떠다니는 조그만 부산 위에 나 있는 대나무를 신문왕이 베어 와서 젓대(笛)를 만들었다. 이 젓대를 불면 병란이 물러가고, 악병이 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장마에 개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므로 만파식적이라 이름지었다. 나라의 보배로 삼은 이 신비로운 젓대가 문무왕 용신과 김유신 천신의 합심으로 이뤄낸 것이라는 사실은 두 성인의 지극한 호국안민의 정신이 하나가 돼 신라를 수호하고 모든 재앙을 물리쳐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성의 지극한 정성이 곧 호국의 정신이었다.

하나의 정신, 그리고 하나의 한반도

신라 사회에서 삼보(三寶)가 호국의 중심이었지만 통일 이후에는 일보(一寶)가 호국의 신물이었다. 삼보는 고구려의 침범을 미리 막아낸 이야기로, 만파식적은 일본의 침략을 미리 막아낸 이야기로 전해졌다. 통일 전의 삼보가 호국보(護國寶)였다면, 만파식적은 통일 후의 호국보였다. 그리고 호국도장으로서 황룡사ㆍ사천왕사ㆍ감은사 등 3대 사찰은 호국신앙의 중심지였다. 호법(護法)이 곧 호국이며, 불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신라야말로 그 자체가 호국의 도장이요 불국토라 믿었던 까닭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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