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이라크 자유작전과 자이툰부대 파병
[중동평화 지원 대한민국 국격 높여 / 2011.07.19]
2003년 3월 20일 새벽 5시 30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테러리즘과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계속해 온 이라크를 무장 해제시키고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s Iraqi Freedom)’을 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4월 2일 국회연설을 통해 미국의 대이라크전 지지를 천명하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2003년 4월 30일 서희·제마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했고, 조속한 전후처리를 위해 미국이 추가 파병을 요청함에 따라 자이툰부대를 파병하게 됐다. (이라크 국민들로부터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로 찬사받는 자이툰부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라크 침공배경과 현대판 전격전
이라크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1414호에 의해 실시된 무기사찰에 불성실한 자세로 임하며 국제사회에 의혹을 증폭시켰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 사담 후세인의 축출, 대테러전의 일환’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라크 공격에 대한 유엔의 동의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전쟁 명분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이라크전쟁에 반대했다. 결국 유엔의 설득에 실패한 미국은 영국ㆍ호주ㆍ폴란드의 지지를 바탕으로 동맹국 지상구성군사령부(CFLCC)를 구성해 이라크를 공격했다.
전쟁 당시 이라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인구 약 2400만 명, 국토면적 43만5000여km²(한반도의 약 2배)의 전형적인 이슬람국가로서 하루 평균 약 25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 이후 1980년에는 이란과 전쟁을,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강제 합병해 1991년 걸프전쟁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이라크 자유작전은 여건 조성, 결정적 작전, 안정화 작전 등 3단계로 구분돼 시행됐다. 제1단계는 전쟁여건 조성을 위한 여론조성과 이라크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군사력을 전장에 전개했다.
제2단계 결정적 작전 간 동맹군은 작전명 `Decapitation(후세인 제거)'을 개시해 개전 첫날 40여 발의 토마호크 미사일과 F-117, B-2, B-52 폭격기 등을 출격시켜 바그다드 시내의 후세인 거처와 군 지휘소를 공격했다. 둘째 날에는 100여 기의 순항 미사일과 항공력으로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청사, 군 지휘부, 방공레이더망 등 주요 전략표적들을 효과중심작전(EBO) 개념에 의해 파괴함으로써 이라크군이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단기에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대규모 공습인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작전을 수행하며 하루 평균 600여 기에 이르는 미사일과 폭탄을 주요 군사표적에 투하해 이라크군 공화국수비대의 전쟁의지를 박탈하고 바그다드 포위 여건을 조성했다. 이어 4월 4일부터는 결정적 전투를 실시해 개전 21일째인 4월 9일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 진입에 성공했다. 동맹군은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고향이자 최후 저항거점으로 지목되는 티크리트로 진격해 4월 14일에는 이라크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제압하고 시를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이라크 군사작전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5월 1일 부시 대통령이 링컨(Abraham Lincoln)호 함상에서 이라크 내 주요전투가 종료됐음을 선언했다.
안정화 작전과 이라크 재건활동
안정화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부 조직을 개편했다. 쿠웨이트에서 초기 군사작전을 지휘·통제했던 지상구성군사령부는 6월 15일 동맹국 합동군사령부(CJTF-7)로 전환됐다. 동맹국 합동군사령부는 바그다드에 위치해 동맹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후세인 추종세력 및 적대세력(insurgents) 소탕 임무를 수행하면서 WMD 확보, 기간산업 복구 및 이라크 재건 지원, 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 군정체제 유지 등 동맹국임시통치기구(CPA)의 ‘이라크 국가재건’이라는 명제의 군사적 분야를 지원했다. 합동군사령부는 2004년 5월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로 개편됐다.
동맹국임시통치기구는 유전, 발전소, 상·하수도 시설 등 국가기반시설 복구에 중점을 두고 재건사업을 추진했으나 후세인 정부 추종세력과 알카에다(AQI)와 연계한 적대세력의 지속적인 공격과 이라크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 과도한 재건 비용 등으로 인해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추가파병 결정·부대 창설
군사작전이 완료된 후에도 이라크는 적대세력에 의한 테러공격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등 전후처리가 곤경에 처하게 되자 미국은 2003년 9월 4일 한국에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정부는 범정부 차원에서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10월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한미동맹과 세계평화를 위해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이후 파병방안을 구체화해 정부의 합동현지조사 3회, 국회조사단 현지조사활동과 수차례에 걸친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파병지역과 시기, 군수지원 등을 협조했다. 그동안 국내의 찬반여론을 결집해 마침내 2004년 2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3000명 규모’의 추가 파병을 확정했다. 자이툰부대의 파병은 국제평화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한 우리 국가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함은 물론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또한 이라크 국가재건 지원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국가위상을 제고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4년 1월 12일 창설기획단(단장 황의돈 소장)이 발족되고 국방부장관의 조기 창설 지시에 의거 2월 23일 자이툰부대가 창설됐다. 고유명칭은 이라크에 대한 지원임무를 표현하고 평화재건이라는 파병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된 ‘이라크 평화ㆍ재건사단’으로, 상징명칭은 평화와 안전을 상징하는 올리브의 아랍어 표기인 ‘자이툰(Zaytun)’으로 선정했다. 파병 후 즉각적인 임무수행을 위해 파병 전 훈련은 3단계로 구분해 자체방호 훈련 및 현지의 문화와 관습ㆍ언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민사작전에 중점을 두고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베트남전 이후 첫 사단급 파병
자이툰부대의 파병은 베트남전 이후 최초의 사단급 파병이다. 파병지역은 최초 키르쿠크에서 이라크 북부 아르빌(Arbil)로 변경됐고 부대전개 계획은 현지정찰 결과와 가용정보를 토대로 주도면밀하게 실시됐다. 부대전개는 한국에서 쿠웨이트로 이동하는 전략적 전개와 쿠웨이트에서 아르빌로 이동하는 작전적 전개로 구분했다. 이라크 내에서의 이동은 이동로상에 적대세력의 공격위험이 상존하고 있었기에 시설준비단의 ‘신천지작전’과 병력들의 공중이동, 사단 본대의 ‘파발마작전’으로 구분해 실시했다. 특히 신천지작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해 자신감을 얻은 한국군은 총 394여 대의 차량과 1175명의 본대를 3개 제대로 편성해 2004년 9월 7일부터 20일까지 총 1110㎞를 차량 행군해 목적지인 아르빌에 무사히 도착했다. 철저한 작전보안 유지 속에 이뤄진 치밀한 준비와 미군의 적극적인 협조 및 지원으로 작전을 완수했다.
작전지역에 도착한 자이툰부대는 살인적인 더위와 모래바람을 극복하고 6개월 만에 725개 동의 컨테이너와 14개 동의 막구조 건물, 3개의 심정굴착, 급수 및 전기시설 등 모든 기반시설을 건설해 완벽한 임무준비를 완료했다. 이후 자이툰부대는 주둔지 자체방호태세를 유지하면서 ‘존중과 배려’라는 모토하에 효과적인 민사작전을 수행하며 국익 창출과 한국군 위상을 제고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장삼열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