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73
일 자
2011.07.14 09:31:40
조회수
348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0>
<10>을지문덕의 전쟁 지휘
[일당백 살수대첩 요동이 요동치다 / 2011.07.14]

 `삼국사기'의 열전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는 명장 또한 적지 않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김유신에 이어지는 두 번째 인물이다. 시대적인 반향을 넘어서서 그는 역사에 주목받는 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한국사에 각인돼 왔다.

수나라의 30만 군대를 섬멸시킨 살수대첩의 디오라마의 사진(전쟁기념관 제공)
을지문덕 장군 영정의 사진(필자 제공)

을지문덕의 인물론

을지문덕의 선대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은 그가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글을 알고 지을 수 있는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일찍이 없었던 ‘요동전쟁’(遼東之役)을 맞아 이를 막아내어 스스로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다 섬멸한 단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됐다.

한말의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을지문덕에 관해 별도의 전기를 썼다. 단재는 그 전기에서 역사가들의 평가를 열거하고 을지문덕의 의백(毅魄)ㆍ웅략(雄略)ㆍ외교(外交)ㆍ무비(武備)ㆍ인격을 논했다. 그에게 을지문덕은 ‘독립적 기상, 건투적 정신의 대표적ㆍ모범적 인물’이었다.

신채호는 을지문덕의 인격을 역대 중국의 식자들이 ‘침(沈)ㆍ지( )ㆍ권(權)ㆍ수(數)’, 즉 침착·용감·권모·술수라 한 데 대해 일견 동의했지만 올바른 통찰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단재는 문덕의 인격적 특징을 진성(眞誠)ㆍ강의(强毅)ㆍ특립(特立)ㆍ모험 등 네 가지로 압축하고, 그가 힘써 다하고, 굳건하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진취적인 모험심의 인물이었다고 보았다. 국제정세를 통찰하지 못한 채 중국에 강경대응해 미움만 사 고구려를 외환으로 망하게 했다는 인식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단재는 오히려 을지문덕을 김춘추와 비교하며 춘추가 한 국가의 현군으로서 그 업적이 신라에 그쳤다면 문덕의 업적은 역사를 통해 영원한 정신으로 이어진다고 평했던 것이다.

을지문덕이 생존한 시기는 영양왕(590~618) 때다. 석다산(石多山) 출신이라는 것 외에 성장 과정이나 장군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경력이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나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 612년(영양왕 23)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의 활약상만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해동명장전’은 1794년 홍양호가 조선왕조가 겪은 전란에 대해 감계(鑑戒)한다는 뜻에서 집필한 책이다. 그는 18세기 후반 ‘영조실록’과 ‘국조보감’ 등의 편찬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홍양호는 을지문덕을 “강적을 무찔러 잘 막아내고, 기묘한 전략으로 변란에 잘 대응하는 인물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의 김유신이나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몸소 큰 국란을 처리해 그 공이 삼한(三韓)을 덮었던 것이니… ”라면서 김유신(庾信ㆍ595~673)과 비교했다.

수 나라의 고구려 침공

을지문덕의 이름은 일찍부터 해외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부하 장군들에게 그를 생포하라는 밀명까지 내렸다. 중원을 통일한 수 나라는 주변의 이민족에 대해 정복정책을 썼다. 그러나 고구려가 굴복하지 않자 정벌하려 했는데, 고구려가 선수를 쳐 597년(영양왕 8) 요서(遼西)를 먼저 공격했다. 이로써 598년부터 618년까지 전후 20년간에 걸친 대격돌이 일어났다. 수는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제1차 침공은 문제(文帝ㆍ581~604) 때 수륙군 30만이 동원됐다. 그러나 역질과 심한 풍재로 수 나라는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고구려 공략에 실패했다. 선왕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뒤를 이은 양제가 2년의 준비 끝에 다시 원정에 나섰다. 612년(영양왕 23)의 일이었다. 총병력이 113만여 명이었지만, 200만이라 선전했다. 양제가 친정한 행군 대열이 960리에 이를 정도로 전례 없는 대군의 동원이었다.

양제는 612년 정월 출정 조서를 내렸다. 정벌군은 3월 14일 요수(요동의 요하)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이 강 동안에 고구려군이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양제는 수군이 바로 도하할 수 없자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에게 부교를 만들게 했다. 5일 만에 부교가 완성됐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도강이 불가능했다. 4월 15일 마침내 강을 건널 때까지는 1개월이 걸렸고 1만 명의 희생이 요구됐다.

수군은 요동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했다. 고구려군은 거부했다. 결국 그해 6월 11일 양제가 직접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의 함락을 독려했지만 성은 견고했다. 양제는 성 공략을 일단 포기했다. 전선의 교착상태에서 우문술과 우중문은 별동부대를 조직해 평양성으로 향했다. 양제가 지명한 24군 가운데 9개 군의 별동부대 30만5000명이 선봉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문덕의 지략 앞에선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을지문덕의 ‘살수회전’ 지휘

을지문덕은 적 사정을 파악하고자 영양왕의 윤허를 얻어 압록강 대안에 포진한 적진을 찾았다. 그는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며 적의 부대를 정탐했다. 우중문이 그를 억류하고자 했다. 양제로부터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위무사 유사룡(劉士龍)의 만류로 문덕은 가까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우중문이 후회하고 다시 그를 불렀지만 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수 나라 군대는 여름철의 무리한 행군에다 군량마저 결핍돼 곤경에 처해 있었다. 문덕은 적을 아군 깊숙이 끌어들여 단박에 반격 분쇄할 전략을 세웠다.

화가 난 우중문은 장수들을 독전해 남하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문덕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적이 피로한 것을 알아차린 문덕은 아군에게 싸우다 패하는 체하며 달아나도록 했다. 수군은 완승을 거두고 고구려군을 추격하며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지점인 신점(新店)에 진을 쳤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써 보냈다. “신묘한 그대의 작전은 천문을 알았고, 기묘한 계책은 지리에 통달했네. 싸움마다 이겨 이미 공이 높았으니, 만족할 줄 알거든 이제 그만 그치시오.”(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이 시 한 수가 수군의 진영을 흔들었다. 분격한 우중문은 답서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문덕 역시 사자를 보내 수군 진영에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수군 지휘부는 병사들이 너무 지쳐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이 험준해 공격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덕의 제안을 빌미로 군사를 돌려 방진(方陣) 대형을 갖추고 철군을 개시했다. 고구려군도 바로 출동했다. 싸우면서 퇴각한 수의 군대가 그해 7월 24일 살수에 도착했다.

수군이 강의 절반쯤 도하했을 때 문덕은 도하 중인 수군의 후면을 습격했다. 수군은 후미의 대장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자 황급히 압록강 쪽으로 도망쳤다. 그나마 왕인공 부대가 압록강 남쪽의 백석산(白石山)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저지했다. 하지만 이미 덫에 걸린 사냥감이었다. 결국 그들은 30만5000명 중 불과 2700명만이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갔을 뿐이었다. 역사는 이를 살수회전(薩水會戰)이라 부른다.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은 그 규모와 위력이 무모할 정도였으나 을지문덕의 지략과 용병술로 개전 5개월여 만에 끝났다. 살수회전은 유인작전과 철저한 기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고구려군이 거둔 승리였다. 을지문덕의 지략과 고도의 심리전략 없이는 이렇듯 완벽한 섬멸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28>
이전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