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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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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6·25전쟁- 분위기 바꾼 `울프하운드' 작전 (국방일보)



제목 :
6·25전쟁- 분위기 바꾼 `울프하운드'' 작전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일보, 2003.01.23


敵 베일벗긴 위력수색 작전

1951년 1월4일, 38선을 돌파한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으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될 경우 또다시 철수해야 할 것''이라는 패배의식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전쟁지도부 역시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반도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협상, 휴전한 뒤 명예롭게 철수하는 방안과 함께 최악의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철군계획까지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었다.

당시 자유진영이 공산 측에 제시한 휴전 조건은 “즉각 휴전하고 참전한 외국 군대는 적당한 시기에 철수하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타이완의 장래와 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는 토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자유진영 입장에서 볼 때 항복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마오쩌둥(毛澤東) 등 중국 전쟁지도부는 이제까지의 세 차례 공세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가장 유리한 협상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었지만 당시 자유진영은 중국의 군사적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협상할 수 없다면 철군계획을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다 탄력을 받게 됐다. 당시 수립된 철군계획의 핵심 내용은 “중공군이 공세를 계속해 국군과 유엔군이 배치돼 있는 37도선으로부터 불과 50㎞ 후방에 있는 금강 방어선에 진출할 경우 철군계획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쯤 도쿄의 유엔군사령부를 방문, 맥아더 원수와 철군 문제를 협의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이 1월15일 방한했다. 철군 문제를 현장에서 보다 심도 있게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1월12일을 전후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의해 야기된 원주의 위기가 해소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됐다.

그러나 계속 추격할 것 같았던 중공군·북한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제는 국군과 유엔군이 이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Mathew B Ridgway)장군은 전선에서 바람과 같이 사라진 중공군의 위치 확인과 함께 그들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위력수색을 명령했다. 사령관의 지침에 따라 1951년 1월15일 아침,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1개 연대 규모의 공격작전이 시작됐다. 평택에서 오산을 거쳐 수원까지 북상하면서 중공군의 반응을 탐색해보는 것이었다. 작전 명칭은 작전부대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의 별칭을 따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공격을 시작한 연대가 오산에 진출할 때까지 중공군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수원까지 진출하자 비로소 중공군의 저항이 시작됐다.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의 경우처럼 자신들을 깊숙이 유인해 후방지역에 상륙할 수 있다”고 우려해 주력을 한강 이북에 두고 한강 남쪽에는 소수의 병력만 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오로지 서울이라는 지형 목표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한 중공군은 보급 및 병력 보충 등 후방지원의 취약점으로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여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방어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울프하운드 작전은 불과 1개연대 병력으로 이틀에 걸쳐 실시된 소규모의 위력수색 작전이었지만 성과는 대단했다. 작전 결과에 따라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긴 중공군의 베일이 벗겨지고 취약점이 노출됐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중공군도 상대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됐다.

울프하운드 작전을 작전적 측면에서 볼 때 `결코 크지 않은 연대 규모의 부대도 적절한 시기·장소에 투입할 수만 있다면 전장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또한 전략적 측면에서도 철군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방한한 콜린스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고 작전 결과가 미국의 전쟁지도부에 즉각 통보됨으로써 자유진영의 한반도 정책을 철군으로부터 반격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던 것이다.

상황이 바뀌자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1월25일을 기해 본격적인 반격작전으로 전환, 한강을 향해 북진하도록 명령했다. `번개작전'', 즉 선더볼트(Thunderbolt)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전선의 상황이 호전되자 자유진영의 전쟁지도부 역시 자신감을 회복하고 철군계획을 폐기했다. 그리고 2월1일 유엔 총회 결의를 통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게 됐던 것이다.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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