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061
일 자
2003.07.20 20:06:12
조회수
274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뱀부계획(Bamboo Plan)과 국방경비대의 창설 (국방일보)



제목 : 뱀부계획(Bamboo Plan)과 국방경비대의 창설

저자 :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백기인

수록 : 국방일보, 2003.03.06


국방경비대의 창설은 최초 1945년 10월 31일 미 군정청 치안국장이며 점령군사령부의 헌병사령관인 쉬크(Lawrence E. Schick) 준장이 군정장관인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에게 ''국방을 위한 준비작업''을 건의하면서 시작되어 그해 11월 13일 국방사령부를 발족시킨 후 군정 당국에서 남한 내 군대조직과 편성에 관한 기본계획안이 수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계획의 과정에서는 군의 성격과 규모 나아가 군의 편성 등을 놓고 한·미간에 팽팽한 논란이 있었다.

건군의 주역인 이응준 장군의 조언은 국방경비대의 창설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였다. 결국, 쉬크 준장에 이어 참페니(Arthur S. Champeny) 대령이 하지의 명을 받들어 마련한 1945년 12월말경에 입안된 이른바 ''뱀부계획(Bamboo Plan)''은 한국측의 의견과 미 군정당국의 입장이 절충된 방안이었다.

미 합참은 1946년 1월 9일 정식으로 한국의 경비대 창설을 승인하고 합동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의 잉여무기로 이를 창설할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하였다. 뱀부계획의 승인으로 경비대 창설준비는 급진전되었다. 마침내 1946년 1월 15일 오늘의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태릉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 1연대 A중대가 편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한국군의 공식적인 출발이요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시작이었다.

이렇듯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던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전신격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이 손원일·정긍모 등 해양인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해군의 창설이 육군보다 빨랐다는 해석은 바로 당시 해사 관련자들이 군정청 해사국의 협력을 받아 200명의 단원을 모아 해안경비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날 해방병단의 결단식을 거행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법제적인 승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방병단은 사실상의 해안경비대로 인정되었고 모든 항만시설 보전을 비롯하여 해난구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국군의 날이 10월 1일로 정해지기 전 각군이 자체로 창설일을 기념하던 무렵에 11월 11일을 해군창설일로 삼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1946년 1월 14일 해안에 관한 주 업무가「군정법령 제42호」에 의해 국방사령부에 이관되면서 1월 15일 해방병단 총사령부가 진해기지에 설치되었다. 그후 해방병단은 그해 6월 15일 공포된「군정법령 제86호」에 의거하여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되었다. 개칭된 명칭은 그해 1월 14일로 소급 적용되었다. 조선해안경비대는 1946년 9월 미 해안경비대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된 16명의 고문단(단장 : George E. McCabe 대령) 파견과 함정도입, 기구확장, 그리고 기지설치 등에 힘입어 점차 면모를 일신해갔다.

재무부 장관 대리 폴리(E. H. Foley, Jr)의 보고서에서 보듯이, 미국은 조선해안경비대에 대하여 신속한 지원과 동시에 철수를 계획하였다. 조선해안경비대는 미 고문단 요원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1946년 9월 15일 미 해군으로부터 최초로 상륙정(LCI) 2척을 인수한 것을 비롯하여 진해, 인천 및 묵호기지에서 디젤함과 증기함 수 척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교육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이날의 함정 인수를 계기로 1948년까지 상륙정 외에도 유조선(YO-1)과 소해정(JMS 및 YMS) 등 모두 36척의 군함이 이전되었다.

한편,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는 대내·외적인 요인으로 개칭 등 변화를 거듭하면서 발전하였다. 당시 경비대의 개칭문제는 대내외의 미묘한 정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국방사령부가 국방부(DND)로 다시 통위부(DIS)로 불리게 된 배경과 유관하다. 1946년 3월경 한국의 장래와 관련하여 개최되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이 "국방부는 무슨 의도로 설치했는가"라고 남한 내 군사조직의 설치에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경비대''이지 ''군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국방''이란 표현을 삭제하고 조선경비대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대내외적인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방경비대는 뱀부계획에 따라 1946년 11월 제주도에 제9연대가 창설됨으로써 모두 9개 연대로 늘어났다. 그후 1948년 2월 8일 북한에 조선인민군이 전격적으로 창설되자 미국은 조선경비대의 국방군으로의 확장에 대해 더욱 절실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더욱이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 맞물려지면서 조선경비대에 대한 확장에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1947년 12월 1일 3개 연대를 1개 여단으로 통합하는 형태로 3개 여단을 서울·대전·부산에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1948년 4월말 서울과 광주에 제4, 5여단을, 그리고 5월초 제10연대를 위시하여 제15연대 등 6개 연대를 추가로 창설하였다. 그러한 조선경비대는 정부수립 무렵에 장교1,430명, 사병49,087명 등 5만여명에 달하는 군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이라크戰 파병은 '안보보험' (국방일보)
이전글 여성이 참여한 3·1 독립운동 (국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