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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7.01.29 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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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4>서울 점령 후 김일성과 팽덕회의 설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서울 점령 후 김일성과 팽덕회의 설전

‘즉시 추격 중지’ 명령 하달로 갈등


▲팽덕회의 전세 판단

중공군은 3차 전역(1951년 신정공세) 작전을 완료한 시점에 남진 강행 문제를 놓고 북한 지도부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조·중 연합군사령관 팽덕회는 3차 공세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모택동의 스탈린을 의식한 정치적 지시에 따라 3차 공세를 강행한 것이었다.

작전 결과 중공군은 유엔군의 철수작전으로 큰 전투 없이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팽덕회는 1951년 1월 8일 즉시 추격 중지 명령을 하달했다. 그 명령은 작전의 성공이 중공군 자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투 과정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의 설전과 스탈린의 중재

팽덕회가 추격 중지 명령을 하달하고 더 이상 남진하지 않자, 북한 지도부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1월 10일 김일성은 팽덕회에게 계속 남진을 종용했고 그와 심각한 설전을 벌였다. 김일성은 적에 정비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되며 영토 확대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팽덕회는 부대를 정비하기 전에 대규모 작전을 수행해서는 안 되며 적을 소멸하면 영토는 자연히 돌아오는 것이라고 맞섰다.

팽과 김일성의 논쟁은 다음날 다시 반복됐다. 먼저 김일성은 아군이 추격하면 미군이 반드시 철수할 것이라 주장했고, 팽은 북한 지도부가 승리의 요행을 바라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휴식을 위해 2개월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언쟁이 격렬해지면서 “내가 총사령관으로 부적격하다고 생각하면 나의 목을 쳐도 좋다”고까지 하면서 흥분했다.

중공군과 북한 지도부 간 갈등이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스탈린이 중재에 나섰다. 결국 스탈린은 남진 강행을 주장하는 의견을 비판하고 중공군의 군사계획이 더욱 일리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더불어 그는 차량 등을 중공군에 지원하면서, “팽덕회가 당대의 천재적인 군사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

스탈린은 3차 전역 직후부터 중공군 지원에 더욱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인천·서울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차량 6000대와 37개 보병사단에 장비를 제공하고 무상으로 Mig - 15기를 제공하며 격려했고, 그동안 미뤄 왔던 중·소 군사차관 협정(12억3500만 루블)도 체결해 줬다.

미군의 전력 소모를 목표로 하고 있던 스탈린 입장은 중공군에 무기를 지원하고 모택동과 팽덕회를 독려해 현재 제기된 유엔의 평화 방안을 중공이 거부하도록 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결정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은 스탈린의 입장에 따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팽덕회와의 회담에서 “북한군 단독 남진은 모험적이며 중공군의 2개월 휴식도 동의한다. 이에 조·중 최고위급 연석회의를 개최해 사상적 단결을 도모하자”고 제안하면서 논쟁을 접었다. 이러한 과정은 공산진영 내 국가 간의 냉혹한 이해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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