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외압과 대원군의 조선
햇살 나는 內政 진땀 나는 外政 [2012.07.25]
당색·지방색 넘어 유능한 인재들 등용 탐관오리 엄단·서원 철폐해 백성 보호 /‘쇄국’으로 급선회 외교 난맥상 드러내 천주교 탄압 서양 무력
침공의 빌미돼
19세기 말 조선에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탐험·측량·통상이 목적이어서 조선에 위협이 아니었다. 정부도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라”는 지시만 내린 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양선은 점차 개항을 강요하는 ‘외압(外壓)’의 전령이 됐다.
▶조선, 청국 소식에 동요하다
1860년 7월, 영불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청의 함풍제(咸豊帝)가 열하(熱河)로 피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위문사 파견을 운운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대궐 밖에선 “영불의 군대가 서울까지 올 것”이라는 등 억측이 난무했다. 사방에서 봇짐을 싸 피난을 가거나 살길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래도 조정은 여전히 안이했다. 1861년 1월 비변사 회의에서 각도의 춘계 군사훈련계획을 보고받을 때도 그랬다. 오랫동안 중단해 온 훈련을 새삼스레 하여 민심만 소란스럽게 할 게 무어냐는 식이었다. 척족의 세도정치가 문란해져 민생이 도탄에 빠졌지만, 지도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층 종교인 동학이 창건돼 시대적 각성을 촉구했으나 여전히 척사윤음(斥邪綸音)의 정신을 고수했다.
▶대원군, 왕권 강화에 나서다
1863년 12월 철종(제25대) 임금이 재위 14년 만에 갑자기 승하했다.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강화도령’이 척족들에게 정치를 일임하고 오랜 병석에 있다가 후사 없이 붕어했다. 왕실의 어른인 조 대비(형 익종의 비)가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으로 지명했다. 그가 고종이다.
당시 12살에 불과한 소년 고종을 대신해 생부인 대원군이 섭정했다. 파락호로 시정을 떠돌던 시절의 경험을 살려 대원군은 사회의 부패한 독소와 정계의 풍토를 일신하려 했다. 순조(1801~34) 이후 60여 년간에 걸친 외척의 세도를 털어내고 왕권을 강화해 사직을 견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함여유신(咸與維新), ‘다 함께 유신하자’가 그가 내세운 기치였다.
▶백성을 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리
경복궁 중건을 위한 막대한 건축비는 왕실 종친과 장안의 유력자들의 원납전으로 충당했다. 지방의 품팔이꾼들이 무등패를 앞세워 농악을 치며 공사장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공사 도중 동십자각 근처의 재목 적치장에 불이 났다. 그러자 중신들이 공사 중단을 들고 나왔다. 대원군은 “그대의 조상은 과연 나라에 충성하여 목숨까지 바친 공신들이었다. … 그대가 조상의 충성스러운 정신을 망각하고 국가의 수요에 불복한다면 충신의 후예답지 못하니 양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누르고 당색이나 지방색을 넘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이도쇄신(吏道刷新)을 꾀했다. 비변사를 창건 300여 년 만에 의정부로 흡수해 국정을 일원화하고 탐관오리와 지방 토호의 횡포를 엄단했다. 특히 서원을 철폐해 평민을 강탈하는 폐단을 막고자 했다. 전국의 600여 개 서원은 47개만을 남기고 모두 폐쇄됐다. 유림들이 대거 상경해 궐문 앞에서 부복 상소하자 대원군은 “백성을 해롭게 하는 자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나더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강 밖으로 축출해 버렸다.
▶대원군, ‘쇄국’으로 급선회하다
내정은 일단 안정된 듯했다. 그런데 대원군의 폐쇄주의가 외교의 난맥상을 드러냈다. 1864년 2월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 5~6명이 국경을 넘은 한인 농민을 앞세워 결빙된 두만강을 건너 서투른 통역에다 꼬부랑 글씨를 내밀며 경흥부에 통상을 요구해왔다. 경흥부사 윤협은 국경 감시를 소홀히했다는 이유로 감봉 처리됐고, 러시아 기병을 따라와 통역을 해준 김홍순은 월경 내통죄로 사형을 당했다. 그래도 코사크 기병의 월경은 계속된 골칫거리였다.
대원군은 외국의 사정에 밝은 천주교 측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부대부인 민씨와 자신의 딸도 신자였고, 고종의 유모 박씨 또한 영세(마르타)를 받은 터였다. 그 역시 흥선군 시절에 천주교를 들여온 남인계 인사와 접촉하기도 했다. 운현궁에서 천주교 간부인 남종삼과 홍봉주를 비밀리에 만났다. 프랑스 선교사 베르뉘 주교를 직접 만나기로 했다. 서학을 불법적인 사교로 금지하던 당시로선 위험천만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작 베르뉘 주교를 모셔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경비도 없었고 일 처리도 허술했다. 남종삼 일행이 가까스로 주교를 모셔왔을 때는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해 있었다. 일이 지연되자 과감하고 기민한 대원군이 태도를 바꾼 것이다. 친구의 아들에게 중대한 일을 부탁했다가 자칫 위신만 손상당할 것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천주교 탄압이 서양 침공의 빌미가 되다
전국에 서교 금압령이 내려지고 무서운 검거의 선풍이 몰아쳤다. 피비린내 나는 교난의 시작이었다. 교난 사태는 결국 서양의 무력침공을 불러왔다. 병인양요(1866)가 바로 그것이다. 내정에서 안정을 찾은 듯한 대원군의 통치가 강경노선의 외정으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