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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4 11: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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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8>

<18>부흥운동과 망국의 후예들
[망국의 모진 삶은 독립 혼을 불태우고… / 2011.09.08]

백제유민의 한과 투혼,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리고 맺힌 임종성 사진.
[백제 유민의 한과 투혼, 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리고 맺힌 임존성]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던 주류성 추정지(부안 우금산성) 사진.
[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던 주류성 추정지(부안 우금산성)]

흑치상지 묘지명(탁본)사진.
[흑치상지 묘지명(탁본)]

망국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 국왕과 지배자들은 영욕의 부침을 겪으며 살다 갔다. 망국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모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왕조의 재건, `독립'에 대한 비원이 싹트기 시작했다.

백제 부흥의 불꽃, 임존성에서 타오르다

나당연합군이 점령한 백제의 땅은 사비성과 웅진성 일대에 불과했다. 두 성이 아수라장이 되자 백제의 유민들은 분노했다. 수많은 성들이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백제 부흥운동의 서막이었다.

임존성(충남 예산 대흥)이 근거지였다. 의자왕이 항복할 때 함께한 7척 거한의 흑치상지가 10여 명과 함께 사비성을 탈출해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10일도 안 돼 3만의 병력이 모였다. 소정방이 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당은 고구려 점령이 최종 목표였기 때문에 9월 3일 소정방을 일단 귀국시켰다. 이 틈에 흑치상지가 여세를 몰아 200여 성을 회복했다.

사비성 함락이 목전에 있었다. 그곳은 1만의 당군과 7000여 신라군이 전부였다. 비밀리에 작전이 전개됐다. 9월 23일 부흥군이 성을 공력해 포로를 탈출시키고 주변에 수 개의 목책을 세웠다. 사비 남쪽의 20여 성이 호응해 왔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이 안간힘으로 성을 지켜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주류성의 불꽃과 백제 부흥군의 내홍

주류성(옛 한산ㆍ부안 우금산성)에서는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이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660년 9월 복신은 왜에 구원을 요청했다.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귀국했다. 그가 오오노오미 고모시키(多臣蔣敷)의 누이를 아내로 맞은 대가로 호위군 5000이 딸려왔다. 왜국은 대규모의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의 원조도 약속했다. 이들은 임존성의 흑치상지와 합류했다.

661년 3월, 1만이 넘는 도침의 군사가 사비성을 포위하며 유인원이 보낸 당군 선발대 1000명을 전멸시켰다. 임존성의 복신도 기세를 올리며 김흠(欽)의 신라 원군을 고부에서 격파했다. 신라로서는 여력이 없었다. 이때 부흥군의 지도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군사를 아우른 것이다. 왕자 풍과의 관계도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662년 7월, 유인원과 유인궤가 합세해 웅진 동쪽에서 복신군을 깨뜨리고 신라와의 보급로를 뚫었다. 이 패배로 복신의 위상이 흔들렸다. 피성(김제)으로 천도한 풍이 다시 주류성으로 옮겨 세력을 강화하자 복신이 선수를 쳤다. 병을 핑계로 문병 오는 풍을 잡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미리 알아차린 풍이 사람을 시켜 복신을 제거해 버렸다. 그의 목은 잘려 소금에 절여졌다. 신라군은 대대적인 평정에 나섰다. 거창·남원으로부터 하나씩 공략하고 마지막엔 당군과 함께 주류성을 함락시킬 것이었다.


백강의 최후

사실 661년 9월 이후 부흥군은 전투에서 밀리고 있었다. 662년 7월 지라성이, 8월에는 진현성과 내사지성이 함락됐다. 원군을 요청받은 왜가 663년 8월 1일 출병했다. 풍왕은 주류성에 일부 병력만 남겨둔 채 백촌강(금강 입구)으로 나갔다. 이미 와 있던 왜군의 수만도 3만이었고 곧 새로 만 명이 넘게 투입될 예정이었다. 부흥군의 군선은 1000척, 당 수군은 170척이었다. 승패는 해전에서 결판날 것이다.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풍과 왜의 장수들이 백촌강에서 당군과 맞섰다(8월17일). 27일 왜의 선발대 1만여 명이 들어왔다. 양군이 격돌했다. 왜군은 승세를 잡지 못했다. 수가 적은 당군은 수비에 치중했다. 다음날 본대 1만7000명이 도착하자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졌다. 이틀에 걸친 네 차례의 전투였다. 왜군은 당군을 과소평가하며 선제공격으로 밀어붙였다. 풍향마저 무시했다. 당은 화공으로 맞섰다. 결국 왜군의 400여 척 군선이 수장되고 말았다. 졸전이었다. 강 대안에서 정예기병과 함께 이를 지켜보던 풍왕은 허리에 찼던 보검도 버려둔 채 종적을 감췄다.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제는 주류성이었다. 문무왕이 거느린 부대가 663년 8월 13일 주류성에 도착했다. 17일부터 압박이 시작됐다. 성은 백촌강의 패전과 풍왕의 피신 소식으로 술렁거렸다. 결국 9월 1일 왕자 충승(忠勝)이 왜군과 함께 항복했다. 나머지 성도 차례로 투항했다. 임존성만은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초 신라의 대군이 들이닥쳤다. 부흥군도 용감히 싸웠다. 신라군도 어쩔 수 없었다. 11월 4일 신라군은 경주로 철수했고, 결국 항복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등을 선봉군으로 앞세운 당군이 임존성을 재공격했다. 지칠 대로 지친 부흥군은 변절한 옛 전우들을 더는 상대할 수 없었다. 결국 임존성도 무너졌다.


고구려의 부흥군

고구려 부흥운동의 주역은 검모잠(劍牟岑)이었다. 668년 9월 검모잠은 유민들을 수습해 왕족 고안승(高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성(재령)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신라와 당의 관계를 이용해 당에 대적하려 했다. 다식(多式)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며 신라를 섬기겠다는 의지를 표했다. 신라도 수락했다. 669년 2월 안승이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이에 신라는 안승을 ‘보덕왕’으로 책봉하고 문무왕의 누이동생과 혼인시켰다. 신라로서도 힘을 합쳐 당을 대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669년 9월 토번(티베트)이 서역의 실크로드를 점령한 것이다. 당은 한반도의 설인귀 부대를 서역으로 급파했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다. 670년에는 당군이 토번 원정을 떠나자 평양의 유인궤가 요동으로 철수했다. 이때 고연무(高延武)가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각각 1만의 군사로 당군을 공격했다. 이로써 적군이 된 당과의 대격전인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당은 671년 안시성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격파하고, 이듬해 8월 평양에 다시 군영을 설치하며 지배권을 강화했다. 백수성에서는 고구려·신라군이 연합해 당군을 대파했다. 공방전이 계속됐다. 하지만 당군의 조직력에 밀린 부흥군의 기세가 점차 꺾였다. 부흥군은 673년 5월 호로하에서 이근행의 말갈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분열이 일어났다. 대처 방안을 놓고 대립하던 중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것이다. 670년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고구려 부흥운동의 끝이었다. 그러나 유민의 일부가 말갈과 합류해 갖은 간난 끝에 발해(渤海)를 건설했다.


망국의 후예들

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한 백제의 흑치상지는 당으로 들어가 토번과 돌궐을 정벌한 공로를 세워 식읍 3000호의 직위에 올랐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의 측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689년)으로 옥에 갇혔다가 60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당했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는 고선지가 주목된다. 그는 1만의 군사를 이끌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과 사라센 제국의 동맹군을 격파했다. 동양의 제지술을 서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된 저 유명한 탈라스전투(751년)의 주역도 그다. 인생의 마지막이 한스럽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신임하던 당 현종의 진노로 현지 참수의 명을 받아 자신이 직접 뽑은 부하들에게 참수됐으니 말이다. 업적이 열전에 실리고 한니발보다 더 위대했다는 평도 있지만, 나라 없는 백성의 출세란 생명을 건 사투나 다름없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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