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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6 09: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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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7>
<17> 고대국가의 양병과 용병
[국가적 수렵행사 전렵·회렵 `전사 등용문' / 2011.09.01]

주몽과 같이 활을 잘 쏘는 전사도 전쟁터의 경험이나 일정한 훈련을 통해 양성됐을 것이다. 탁월한 무예적 재능이 천부적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훌륭한 전사는 훈련과 학습으로 태어난다. 평소에 익힌 무예 솜씨를 국중대회에서 겨루고, 국가적인 수렵행사인 전렵이나 회렵을 통해 군사훈련을 도모한다.

온달(溫達)의 경우가 말해 주듯이 국중대회나 전렵·회렵은 전문 전사로 입문하는 통로였다.

덕흥리 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는 수렵도와 천계사진.

리더의 미덕, 기마선사력

 평소에 말 타고 활 쏘기를 즐긴 고구려인들은 기마선사력(騎馬善射力)을 미덕의 하나로 여겼다. 교육기관인 경당은 지방의 행정제도가 형성될 무렵에 출현했다. 그곳에서 행한 습사(習射)는 군사의 양성 과정이 됐고 평민 자제에게도 병서와 무예를 가르쳐 군사 인재의 저변이 급속히 확대됐다. 한미한 출신의 을지문덕도 경당을 통해 입신한 대표적 인물이다.  고구려의 용감한 전사들은 전술적으로 산악지형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들의 전법은 태조왕 대까지는 졸본지역으로 이주해 온 유목생활의 유습대로 기병을 이용한 ‘속전속결’이었다. 그러나 244년 위(魏) 관구검이 침공해 왔을 때 방형진에 말려 환도성을 빼앗겼고, 369년 고국원왕 때에는 백제의 북방요새인 치양(원주)을 공격하다가 백제군의 반격과 복병전으로 국왕마저 전사함으로써 전술의 근본적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제 보병을 운용하고 기존의 성곽을 활용한 청야전법, 그리고 기습적인 공격술이 고구려의 기본 전술이 됐다. 적군인 중국의 전통적인 분진합격(分陣合擊)에 대항해 청야전술(淸野戰術)과 이일대노(以逸待勞)를 기본으로 하는 수성전(守城戰)으로 적의 역량을 말살시키는 소모전을 전개한 것이다. 적에게 소모를 강요하면서 장기적인 지구전으로 몰고 간 후, 적군의 보급선이 신장되고 조달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결국 적군이 퇴각할 때가 되면 주요 지점에서 매복작전으로 치명타를 가하고, 다시 추격전을 전개해 적을 섬멸한다는 전형적인 선수후공(先守後攻) 전략의 구사였다.>

지형 요인과 연계(連繫)한 군사전략 운용

 고구려의 군사전략에서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는 평지성과 산성의 연결은 필수적이었다. 전술적으로 견고하게 연결된 성곽과 인근 촌락민과의 유대, 그리고 각 성 간의 긴밀한 지원망의 구성과 종심 깊은 성곽 배치에 의한 축차적인 방어체계가 기본 방어력이었다.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현저해진 북수남진(北守南進)의 정책은 육로와 해로의 군사력을 동시에 활용하는 입체적인 수륙병진(水陸竝進)의 실현이었다.  고구려의 전략가로는 서기 전 9년 선비족 침공 당시의 부분노, 28년 후한 요동군 침공 때의 을두지, 그리고 172년 역시 후한의 경림군 침공 때 활약한 명림답부 등이 손꼽힌다. 고구려인들은 ‘손자병법’이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능수능란한 재래 병법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재상으로서 전쟁 지도를 담당한 명림답부는 적 정보와 적군의 전투 능력, 지형과 계절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전쟁 지도력을 잘 보여준다. “싸울 군사가 많으면 공격하고, 군사가 적으면 방어해야 하는 것이 병가의 도리다. 지금 한나라 군사는 천리 먼 곳에서 군량을 운반해 와야 하기 때문에 오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 밑에 해자를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청야전법을 써서 오래 기다리면 적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피곤해 회군할 것이니 우리는 그때 날랜 군사로 그들을 몰아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도 마찬가지다. 연개소문은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가 거론되지만 군사적으로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통의 수성전법을 넘어서 보병과 기병의 기본 전술에다 전차 운용술을 결합시킨 새로운 평야전법을 개발했다. 지금은 일실됐지만 그의 아호를 딴 ‘김해병서’가 ‘연개소문 병법’의 병서라는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중국의 역사상 손자·오자에 비견되는 당의 전략가 이정이 자신의 저술인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서 태종과 전쟁을 논하면서 연개소문의 병술을 거론하고 있음이 결코 심상치 않다. 삼국시대에 병가의 현량이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할 만하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 지휘통솔의 기본

 백제의 국왕이나 지도층도 고구려처럼 친수(親帥)하거나 견병(遣兵)에 직접 참여했다. 국왕은 개인적으로 선사력(善射力)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정치 리더로서뿐만 아니라 군사 리더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수렵문화와 농경문화의 불안한 이중적 공생은 군사발전에 적지 않은 장애로 작용한 듯하다.

 백제인들은 처음에는 고구려를 대상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대체로 신라를 상대로 공격 일변도의 전쟁을 수행할 정도로 편향적인 일방 공격에 집착했다. ‘요서경략설’에서 보듯이 분명히 백제인들은 해양전략에도 일가견이 있었을 것이다. 관사나 습사가 행해졌고 사대(射臺)도 건립됐다는 사실은 분명히 군사교육과 훈련이 장려됐음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인들은 상대적으로 타국보다 국왕 자신부터 잦은 전쟁에 대한 염증으로 지쳐간 징후가 뚜렷하다. 왕조의 존립 기간 중에 고구려와 36회, 신라와 70여 회의 전쟁을 치른 백제는 4세기 고구려와 집중적인 충돌로 국력이 소모돼 국가발전이 둔화됐고, 6세기 이후에는 신라와의 충돌로 남방의 경제력으로도 국가 재정을 충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그들이 만난 불교와 도교는 그들의 정신적 도피처가 됐다. 전쟁에 심신이 지친 무왕은 이에 심취했고,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여 들여 방장선산(方丈仙山)이란 인공 섬을 만들어 빈번한 연회를 개최했다. 백성과 신하들이 그곳을 대왕포(大王浦)라 빈정댄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전쟁에 대한 염증은 바로 국왕 자신에게서 소리 없이 번져 나갔던 것이다.

 신라에서도 국왕의 대열이나 순행이 행해졌다. 그러나 신라는 독특한 나름대로의 군사문화를 일궈냈다. 사회 전반에 걸쳐 호국의 정서가 넘쳐났으며, 화랑의 양성 과정이 말해 주듯이 국가의 인재 양성과 군사교육 훈련이 일체화된 제도적 증거가 분명하다. 국가관과 생사관은 말할 것 없고 그들은 인간의 도의를 실천하며 삶과 죽음을 초월한 높은 이상적 가치를 존숭했다.  화랑들은 서로 도의로써 수련하고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산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전인적 인간을 지향했다. 종교적 교의와 인격의 수양을 일체화한 그들의 정신세계는 고매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군인정신의 정화로 표출됐다. 김유신이 보여주듯이 지략과 탁월한 무예 능력을 겸비하면서도 매사에 지성(至誠)을 다하는 태도, 위기시에 좌절하지 않고 지혜와 수완을 발휘하는 인간 한계성의 극복, 그리고 뭇 장수나 부하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간 사랑에 바탕을 둔 그의 지휘통솔력은 가히 군인정신의 전범이었다.

삼국시대 군인들의 인간상

 삼국의 군인은 문무겸전의 인간을 지향한 국가의 동량이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 우문술·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그들의 치발(?髮)을 물리쳤으며, 백제의 장수들은 중국의 경전에 밝았고, 신라의 화랑들은 심신도야와 무술 나아가 유교경전도 수양 과목으로 삼아 탐독했다. 대담한 지략과 견식을 가진 김유신은 당시의 무장이 단지 무술만을 일삼는 군인이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문무겸전의 전인적인 인간을 목표로 한 교육이 배출한 엘리트들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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