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다국적군사령부와 한국군협조단(하)
[존중과 배려로 이라크 정상화 희망의 불 밝혀 / 2011.08.30]
이라크 전쟁(OIF)은 2006년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하고 2006년 12월 이라크정책연구팀(ISG: Iraq Study Group)의 79개 권고안이 제시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내 반전 분위기와 세계 여론 악화로 인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0년 8월 임무종결을 선언했고 미군을 제외한 동맹군은 모두 철수했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자이툰부대와 다국적군사령부(MNF-I) 내 한국군협조단 및 참모부 요원들은 탁월한 임무수행으로 한국군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 아직도 갈길 먼 이라크 치안
MNF-I 사령부에서 이라크 정상화를 2008년까지 달성하기 위해 3단계로 구분해 추진했다. 1단계는 안정화 단계로서 정통성 있는 정부 구성과 함께 바그다드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알 카에다(AQI)를 고립 격멸하는 것이다. 2단계는 문민정권의 복원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이라크 국민에게 책임과 권한을 전환하는 것이며 국제적인 투자와 석유 이익을 증진하면서 주변국과의 정상적인 외교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3단계는 이라크의 정상적인 자립을 지원하는 단계다.
이라크 안정화 작전은 2006년 2월 발생한 황금사원 폭파사건을 기점으로 후세인 최종 재판과 처형(2006.12.30)을 전후해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면서 한때 내전(Civil War) 위기까지 고조됐다. 종파 간의 암살조(death squads) 공격으로 불안한 시기에 신성시해 왔던 모슬렘 성전(Mosque)이 테러의 표적이 되면서 치안은 최악의 상태가 됐다. MNF-I 사령부는 적대세력(insurgents)을 격멸하고 종파 간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시리아와 이란의 국경지역을 전면 차단해 저항세력의 국내 유입을 방지하려 했으나 효과가 미흡했다. 바그다드에서는 암살조에 의한 종파 간 보복테러로 인해 2006년 7월 중 민간인이 1270명 사망하는 등 대량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면서 한때 종족 간의 내전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MNF-I사령부는 바그다드의 안정 없이는 이라크의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바그다드 치안 확보에 돌입했다. 2006년 6월부터 바그다드 작전(Operation Together Forward)을, 2007년 초에는 신바그다드 작전을 실시하면서 미군 증강과 함께 강력한 소탕작전을 펼쳤다. 작전 결과 풍선효과(balloon effect)가 나타났다.
즉, 전투력이 집중되는 지역은 치안이 유지됐지만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테러가 발생했다. 미군 증원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시리아 등 주변국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적대세력을 완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당시 이라크 치안군은 적대세력 격멸작전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라크 내 적대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방법이 다양화되고 지능화됐다. 특히 급조폭발물(IED, VBIED: Vehicle Borne Improvised Explosive Device)에 의한 대량 피해는 이라크군이나 동맹군에게 커다란 부담감이 됐다. 미군의 전사자는 주요전투(2003. 3. 20∼4. 30)에 139명에 불과했으나 안정화작전 기간(2003. 5. 1∼2010. 8. 31)에는 4300명으로 증가했다. 사담 후세인에 대한 마지막 재판이 진행되고 사형(2006. 12. 30)이 집행된 2006년 후반기에는 1일 평균 약 90회의 적대세력에 의한 공격으로 피해가 급증했다.
▶ 이라크 재건과 PRT
다국적군사령부는 이라크 정부와 긴밀한 협조하에 이라크의 재건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라크 말리키 총리는 이슬람권 주요 국가를 순방하면서 관계 정상화와 신정부의 주변국 지지를 당부했다. 대내적으로는 종족·정파 간 대화합을 강조하며 발전소ㆍ송전소ㆍ송유관 등 낙후된 사회기반시설과 병원ㆍ학교ㆍ상하수도 등 민생안정시설의 긴급 복구 및 취업률 향상에 주안을 두고 추진했다. 다국적군의 지원하에 이라크 정부는 유류생산과 수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파괴된 유류생산 시설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원유 생산량이 250만 배럴, 원유 수출량은 170만 배럴 정도로 전쟁 이전 상태보다 개선되지 않았다. 전력 발전량도 총수요전력(9000MW) 대비 50%에 미달되는 4000MW 수준이었다.
특히 사업장에 대한 적대세력의 IED 공격은 이라크 재건에 치명적이었다. 이라크에 할당된 초기 재건자금 220억 달러의 대부분이 파괴된 기반시설 복구에 허비됐지만 실제 이라크 국민이 느끼는 재건 지수는 아직 수요의 70%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서 이는 이라크정부ㆍ미국ㆍ동맹군에 대한 총체적인 불만과 민심 이반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라크 재건에 또 하나의 걸림돌은 종족 및 정파 간의 갈등이었다. 유류 생산 및 개발권을 놓고 중앙정부와 북부의 쿠르드 지방정부 간의 힘겨루기가 심화됐다. 유전이 상대적으로 남부에 집중돼 있어 석유자원이 빈약한 서부의 수니파는 연방제 추진에도 제동을 걸었다.
MNF-I 사령부에서는 이라크의 효과적인 재건을 위해 지방재건팀(PRT: 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을 설치 운용했다. PRT는 2004년 중순부터 운용 중인 지역별 지역지원팀(PST)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2005년 11월부터 정상 운용되면서 지방정부의 자치 능력을 향상시키고 지방재건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007년 이후에는 인접 여단전투단과 긴밀한 협조가 가능한 ePRT를 추가로 운용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 동맹군에 확산된 자이툰 민사작전
초기에는 무력 위주로 안정화 작전을 수행했으나 성과가 미흡하자, 2006년부터 주민 친화적(Non-Kinetic) 민사작전이 추가된 ‘작계 06-01’을 수립해 시행했다. 이와 함께 MNC-I 커렐리(LTG Chiarelli) 군단장은 사령부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자이툰부대가 수행 중인 민사작전을 모델(Zaytun-like operation)로 제시했다. 이후 거의 매주 사령부 참모진과 장군들이 노하우(know-how)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자이툰 사단의 민사작전 현장을 방문했다. 사실 자이툰의 민사작전이 처음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으나 ‘존중과 배려’의 모토하에 그동안 땀 흘리며 노력한 성과가 뒤늦게 빛을 본 것이다. 현지 주민들에게 물고기를 그냥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이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2006년 9월 폴란드에서 개최된 세계동맹군협조회의에서도 민사작전의 모델로 자이툰부대의 민사작전이 소개돼 극찬을 받았다.
또한 MNF-I 및 MNC-I 사령부의 참모진 20여 명으로 각 참모부에 편성이 돼 탁월한 업무수행 능력을 과시하며 다른 다국적군 장병들의 귀감이 됐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특수 유전자(DNA)를 가진 한국군 해외파병 장병들은 섭씨 50도가 넘는 무더위와 모래 바람을 이겨내고 세계평화와 이라크 재건에 기여한 결과, 귀국하면서 대부분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동성무공훈장, 공로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또한 그들이 귀국 후 작성한 귀국 보고서는 한국군의 정책 결정과 향후 PKO 및 해외파병 업무 추진에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장삼열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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