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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17: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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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1>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작전지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1>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작전지도

승리 여건 확보 후 신속한 결행


▲백선엽 장군 평가

6•25때 국군 최고의 작전지휘관은 누구일까? 6•25참전 육군 장군 출신 200명의 설문 조사에서 백선엽 장군이 뽑혔다. 이는 초대 2군사령관 강문봉 장군이 1983년 그의 박사논문 작성을 위해 조사한 설문 결과에서다. 이 논문에서 강장군은 백장군을 군인 중의 군인으로 평가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백장군을 나의 어금니 또는 한국의 아이젠하워라고 부르며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6•25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밴플리트 8군사령관도 미군의 가혹한 시험을 통과한 한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지휘관으로 호평했다.

한미연합군사령관을 역임한 라포트 장군은 그를 가장 존경한 군인이자 스승으로 평했고, 벨 장군도 그를 세계 각국의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이자 참군인으로 칭송했다. 특히 그는 95년 학계•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가운데 한국군 제1의 야전지휘관에 선정됐다. 이로써 그는 한국 최고의 작전지휘관의 입지를 굳혔다.

▲백선엽 장군의 작전지도

그러면 무엇이 그를 최고의 작전지휘관이 되게 했을까? 이는 그의 천부적 자질, 사려 깊은 배려와 겸허함, 뼈를 깎는 노력과 성실성, 사선(死線)에서 터득한 전쟁 원리를 응용한 결과였다. 그는 전임 참모총장 정일권•이종찬의 경력에 비해 화려하지 않다. 그는 이들 총장들이 일본 육사와 미 지휘참모대학을 나온 것과 달리 만주군관학교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미군의 신뢰를 받으며 누구보다 잘 싸웠다.

이는 평양사범학교의 교련, 군관학교의 전술학과 전사교육, 미 고문관에게서 습득한 전술과 영어가 바탕이 됐다.6•25때 국군과 유엔군이 치른 전투는 약 233개다. 군사전문가들은 이들 전투 중에서 10대 전투를 선정했다. 이의 기준은 승패에 관계없이 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전투, 피•아 주력이 지향된 결전 성격의 전투, 전투 능력과 생존성 등이었다.

그중 백장군은 6•25의 백미(白眉)인 다부동전투와 평양탈환작전에서 승리했다. 다부동전투는 피의 혈전인 낙동강에서 북한군 3개 사단에 맞서 국군1사단을 주축으로 한미연합군이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그의 평양 선봉 입성은 경쟁부대인 미1기병사단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진 1사단이 발이 부르트도록 밤낮으로 걸으며 싸운 피나는 결과였다. 이때부터 미군은 국군을 신뢰했다.

또 그는 중공군 침공으로 유엔군이 철수할 때 국군 사단 중 유일하게 1사단을 온전히 철수시켰고, 유엔군의 재반격시 서울을 재탈환한 1사단을 지휘했다. 이로써 그는 적도(敵都) 평양과 서울을 탈환한 지휘관이 됐다. 동부전선의 1군단장시 그는 고성 남방까지 진격해 동해안의 휴전선을 북으로 올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는 백야전전투사령관으로 지리산일대의 공비를 단기간에 섬멸, 최고 작전지휘관으로 인정받아 최연소(33) 참모총장과 최초의 대장이 됐다.

그는 패배를 모르는 장군이었다. 그의 작전지도는 먼저 승리할 여건을 만든 후 전투하는 것과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고 확신이 서면 신속히 결행하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뜨거운 부하사랑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에게는 관대한 덕장이었고, 또 자신의 밝고 깨끗한 마음을 믿고 소신을 밀고 나가는 장군의 덕목을 두루 갖춘 ‘장군 중의 장군’이라는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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