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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6 10: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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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27>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승리 전략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27>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승리 전략

병력 손실 최소화… 적 보급•퇴로 차단


▲맥아더와 한국, 그리고 이승만
미국 역사에서 장군 계급으로 제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맥아더 원수가 유일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42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한 후 최연소 장군 진급과 함께 여단장•사단장을 역임했고, 전후에는 최연소 육사교장•참모총장이 됐다. 그의 아버지 아더(Arthur)도 남북전쟁시 용맹성을 인정받아 19세에 대령으로 진급해 최연소 연대장을 역임한 후 중장으로 퇴역한 전쟁영웅이다.

맥아더 부자는 전장에서 용감하기로 유명하다. 아더가 19세에 연대장이 된 것도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기수 대신 부대기를 들고 최선봉에서 돌진해 그의 연대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도 제1차 세계대전시 참모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늘 그랬듯이 공격의 맨 선두에 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그가 받은 훈장만 미국에서 12개이고, 연합국에서 19개였다. 태평양전쟁 때는 남서태평양사령관으로 87회의 육•해•공 합동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일본군을 본토로 압박해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결과 그는 군신(軍神)으로 존경받았다.맥아더 집안과 한국은 6•25이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19세기 말 아더 장군은 한국을 방문해 고종에게서 향로를 하사받았다. 맥아더는 부친의 이 유물을 소중히 간직했는데 코레기돌 전투에서 그만 분실했다.

이를 안 이승만은 비슷한 모양의 향로를 구해 맥아더에게 선물했다. 또 이승만은 맥아더를 소령 때부터 알았다. 이로 인해 맥아더는 일제 패망 후 이승만의 귀국을 지원했고, 대통령이 된 그를 일본으로 초청해 한국 안보를 논의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이 6•25가 터졌을 때 맥아더에게 전화로 구원을 요청하거나 그가 해임됐을 때 한국 전선에서 기둥을 뽑아 버렸다고 한탄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맥아더 장군의 승리전략
1950년 7월 8일 미국은 유엔의 결의에 따라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한 데 이어 7월 24일에는 극동군사령부를 모체로 일본 도쿄에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했다. 맥아더가 70세의 고령인데도 사령관이 된 것은 한국에서 가까운 일본 주둔 극동군사령관이자 그동안 전쟁에서 보여 준 천재적인 군사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패배를 모르는 장군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그는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의 보급과 퇴로를 차단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전략을 사용했다. 한강방어선 시찰 후에도 그는 어김없이 적의 보급과 퇴로를 끊는 상륙작전을 구상했고, 상륙지점으로 서울의 관문인 인천을 선택했다. 이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그의 오랜 지휘철학에서 나왔다.

인천상륙작전은 미군의 정면 공격에 따르는 10만 명의 병력 손실을 줄였다. 워커 8군사령관은 맥아더의 전략을 구현하기 위해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얻는’ 작전술 차원의 지연작전을 전개해 성공시켰다.맥아더는 합참이 부여한 북한군 격멸에 전념했다. 그는 사령관 재임 중 15회의 전선 시찰을 통해 필승의 신념을 고취했다.

이는 그가 장군으로 참전한 세 번의 전쟁 경험과 해박한 전사지식, 그리고 오랜 군대 생활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그것은 군인에게 ‘승리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상 어느 영웅 못지않은 위대한 군인의 발자취를 남겼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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