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535
일 자
2008.02.25 09:23:55
조회수
2393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57>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국대사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57>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국대사
외교전선 최선봉에서 고군분투

▲이승만 대통령의 대미외교 기조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추구한 외교 중심축은 미국이었다. 그는 단순한 대미(對美) 일변도가 아니라 미국을 외교의 전부로 생각했다. 미국에서 30여 년간 망명생활을 하며 고학으로 최고 명문대학을 졸업한 그는 누구보다 미국의 국가전략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뛰어난 외교 협상력을 갖췄다. 그는 6·25 때 미국 대통령처럼 한국 전선에 파견된 미국 장성들과 주한미국 대사를 어루만지고 달래며, 한편으론 호통을 치며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미외교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절대적 도움이 필요한 빈국(貧國)이자 분단국가 대통령이면서도 세계 최강국 미국을 상대로 당당한 외교전선을 펼쳤다. 그는 국익을 위해 워싱턴에 무모할 정도의 ‘위협과 도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먹히지 않을 경우 그는 직접 미국 언론에 호소해 가며 워싱턴을 압박하는 외교전략도 구사했다. 이처럼 그는 6·25라는 국가 위기 속에서 국익을 위해 노구를 마다하지 않고 외교전선의 최선봉에서 고군분투하며 실익을 챙겼다.

그렇기에 이대통령을 상대했던 많은 미국사람은 선의든 악의든 그를 고집스럽고 변덕스럽고 교활하고 독단적이고 무모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애국심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전쟁 기간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주한미국 대사들이 그러했다. 73세에 대통령이 된 그를 상대한 미국 대사들은 50세 전후였음에도 그의 타고난 체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대통령은 재임 동안 5명의 미국 대사(무초·브릭스·레이시·다울링·메카나기)를 겪었으나, 6·25 때는 무초(Muccio)·브릭스(Briggs) 2명이었다. 전쟁 동안 그는 일관되게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에 반하는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휴전 후 부임한 레이시 대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6개월 만에 쫓아낸 것은 외교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그는 한국 입장을 이해하고 따르는 미국 대사에게는 인자한 어버이처럼 대했으나 그렇지 않으면 매섭게 대했다.

▲미국 대사의 역할

6·25는 미국 대사의 위치를 크게 클로즈업했다. 미국 대사는 붕괴 직전에 있던 한국 정부를 유지하고 이대통령을 보좌하며 전쟁수행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미국 대사는 워싱턴의 지시를 한국에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이대통령의 훈계와 질책을 받으며 워싱턴에 한국의 입장을 설득하고 이대통령의 뜻을 받드는 ‘곤혹스러운 임무’를 수행했다.

초대 대사 무초는 1948년 7월 20일 특별사절로 부임했다가 49년 1월 1일 미국이 한국을 승인하고 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한 후인 4월 20일부터 대사직을 수행했다. 그는 52년 6월까지 재임하면서 이대통령에게서 숱한 구박과 질책을 받으면서도 그의 애국심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전쟁으로 어려운 한국을 위해 애썼다.

부임시 48세의 총각 대사 무초는 53년 결혼했고, 73년 한국을 다시 방문해 이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이화장의 프란체스카를 방문했다. 2대 대사 브릭스도 이대통령에게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이는 그가 52년 11월 휴전임무를 띠고 온 ‘휴전대사’였기 때문에 미움을 샀다. 휴전을 반대하던 이대통령의 눈에 그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휴전을 강행하는 워싱턴과 이에 맞서는 이대통령 사이에서 그를 달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켰다. 한미동맹의 기초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이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쟁취한 ‘한국의 소중한 안보자산’이다. 전쟁 없는 정전체제가 약 60년 동안 유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2.25]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국군발달사-<6>해군 창설 과정
이전글 [국방일보]국군발달사-<5>해군 창설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