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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06: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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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55>유엔군의 38선 진격 작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55>유엔군의 38선 진격 작전
좌우 전선 균형 유지 후 중앙 거점 돌파

▲전선 상황

6·25전쟁 양상은 최초 국군과 북한군의 양자 대결에서 나중에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과 이후 소련·중공의 개입으로 국제전쟁으로 변했다. 이에 전선의 작전을 총괄하는 작전지휘부도 한국 육군본부와 북한 전선사령부의 작전술 대결에서 유엔사와 중조연합사의 전략적 구도로 확대됐다. 중조연합사는 3차 공세를 통해 유엔군의 국경선 진격을 차단하고 이들을 37선까지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미8군사령관이 전사하고 후임에 전략가로 이름난 리지웨이가 부임했다. 리지웨이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웨스트포인트 동기였다. 브래들리가 참모총장의 임기를 끝내고 후임을 물색할 때 그는 가장 유력한 총장 후보였다. 그러나 그의 두 번 이혼, 세 번 결혼, 정책부서의 근무경험 부족이 불리하게 작용해 콜린스 장군에게 밀렸다. 그는 참모차장에서 워커의 사망과 맥아더 요청으로 사령관이 됐다.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는 부대 현황과 적정을 파악도 하기 전에 중공군의 3차 공세를 맞아 서울을 내주고 37선에서 재편성을 했다. 이때 전선은 오산∼여주 이남∼제천북쪽∼단양∼삼척을 연하는 선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독자적으로 운영된 미10군단을 미8군에 배속시킨 후 예하의 한미 5개 군단을 전 전선에 배치해 상호 협조된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서부전선에 미군 2개 군단을, 중부전선에 미군 1개 군단을, 중동부·동부전선에 국군 2개 군단을 배치했다. 이때 미군은 기계화부대의 기동이 보장받는 서부·중서부전선을 담당했고, 국군은 산악지형인 중동부·동부전선을 맡았다. 하지만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론이 나온 가운데 전개된 이 시기 전황은 한국에 낙동강 방어작전에 이은 ‘제2의 위기’였다.

▲유엔군의 반격작전

제2차 세계대전 시 유럽전선에서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 밑에서 공수군단장으로 지략과 용맹을 떨쳤던 공격형 지휘관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중순 유엔군이 재편성을 마치자 38선 진격을 위한 대반격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맥스-미니엄(Max-Minium)전략’에 기초해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철저히 적을 격멸하면서 38선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서울 재탈환도 포함됐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권투선수가 상대편 선수의 능력을 탐지하기 위해 적절한 펀치를 날리며 가벼운 몸짓으로 탐색전을 하듯, 적정을 살피기 위해 적의 주력이 지향된 서부전선에서 위력 정찰을 두 차례 실시했다. 미 1군단에서는 미 27연대전투단이, 미 9군단에서는 존슨특수임무부대가 이를 수행해 수원·여주 이남에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리지웨이는 동서로 전개된 전선의 균형을 유지한 다음, 전선 중앙의 전략적 거점(홍천·춘천)을 공격해 탈취하고 이를 기점으로 동서 양 전선을 이 지점까지 끌어올려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며 북진하는 작전 방식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서울 동측방으로 우회해 북진함으로써 적이 스스로 측방 및 퇴로차단의 위협을 느끼고 퇴각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개념하에 그는 전선 균형 유지와 한강선 진출을 위한 먼저 선더볼트작전을 서부전선에서 전개한 데 이어 중부전선에서 라운드업작전을 전개해 서부전선과 균형을 유지했다. 그는 이런 작전 방식으로 킬러·리퍼·러기드작전을 전개해 38선 북방의 캔자스선을 작전 개시 약 2개월인 4월 8일 확보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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