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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6 08: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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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12>건군과 여성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12>건군과 여성
1948년 8월26일 간호장교 1기 탄생

건군기에 여성 인력은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부대에 편성된 여자항공대, 체육교사를 임관시켜 예비역으로 전환한 여자배속장교, 그리고 육·해군에서 운용한 간호대에서 활동했다.여자항공대는 1949년 2월 15일 육군항공부대(김포 소재) 예하대인 여자항공교육대로 출발했다. 당일 정광모 외 14명의 교육생이 제1기생(항공병)으로 입교했다.

교육대장에는 이정희 중위가 임명됐는데,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박경원과 중국군 제1비행대 소속의 권기옥에 이은 세 번째 비행사로 공군 최초의 여군이었다.대원들은 2주간의 기본군사훈련에다 조종·정비·통신·기상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남성과 동일한 복장·급식·훈련이 적용됐다. 여자항공교육대는 49년 10월 1일 공군이 독립할 때 여자항공대로 개칭했다.

여자항공대는 곧 공군 수뇌부에 의해 확고한 공군의 일원으로 인정됐다. 김정렬 총참모장은 항공대원들이 일반 기상관측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휘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틀 후인 6월 27일 해체돼 희망자만이 공군본부와 각 부대에 남아 인사행정·통신·보급 업무에 종사했다.

한편 정부 수립 직후 중학교 이상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편성, 교련교육을 실시함에 따라 교련교사의 확보가 필요했다. 이에 체육교사들에게 군사교육을 이수케 해 예비역 장교인 배속장교로 임관, 교련교사로 충원했다. 배속장교는 세 차례에 걸쳐 모집돼 육사에서 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그중 제3기 배속장교 후보생은 여자로 편성,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사범대학(현 국립의료원)에서 교육했다.

훈련대장은 김현숙이었고, 구대장은 조선민족청년 단원인 김정례·윤희열 등이 맡았다.임관 후 대부분의 여자 배속장교의 대원은 각 학교로 복귀했으나, 일부는 중앙학도훈련소 소속으로 여자훈련소가 설치되자 잔류했다. 그러나 49년 9월 27일 학도호국단의 폐지로 해체됐다. 그 후 여자청년단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시에 여군 창설에 앞장섰다.

또 육·해군의 간호대 역시 주된 여성건군 멤버다. 48년 5월 1일 영등포 대방동(구 공군본부 위치)에 제1육군병원이 창설돼 전문간호 인력이 필요하자, 통위부에서는 미8군 간호고문단의 협조하에 면허를 소지한 간호원을 장교로 임관시키는 간호장교후보생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인 여의사의 신체검사와 면접을 거친 간호대원들은 선발과 입대·임관을 동시에 치렀다.

그해 8월 26일 간호장교 1기생의 임관은 세간의 관심사였는데, 한국 첫 여군의 탄생이자 여성장교의 임관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경비대총사령부 명령(특) 제128호로 임관된 간호장교 31명 중 서구식 교육을 받은 12명은 제1육군병원에, 나머지 장교들은 미 제382후송병원에서 3개월의 군사훈련과 실무교육 후 그해 연말에 창설한 제2·3육군병원에 배치됐다.

육군의 간호대는 6·25전쟁 직전까지 5개 기가 배출돼 모두 120명에 이르렀다. 해군도 49년 2월 7일 진해에 있는 군의학교의 전신인 위생학교에 간호장교 교육대를 신설하고, 21명을 입교시켜 그해 4월 9일 임관 배출했다. 6·25전쟁 직전까지 해군의 간호장교 수는 2개 기에 48명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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