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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7 09: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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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63>이승만의 ‘한국적 기독교 국가’ 건설과 신앙 전력화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3>이승만의 ‘한국적 기독교 국가’ 건설과 신앙 전력화
신앙은 곧 전력…군종제도 도입

이승만은 한국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카리스마가 넘치는 국가지도자였다. 그의 카리스마는 그가 오랫동안 공들인 기독교 신앙생활과 관계가 깊다. 그는 미국 유학 때 국제정치학 외에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그 후 서울에서 YMCA학감(學監)도 지냈다. 1913년 하와이로 망명한 그는 25년간 한인기독학원·기독교회를 설립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후 대통령이 된 그는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했으며 정동교회에서 주일예배도 거르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한평생 종교와 정치를 영위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24세(1899년) 때 한성감옥에 투옥돼 29세(1904년)까지 5년 7개월간의 영어(囹圄)생활에서 비롯됐다.

이승만의 투옥은 자신이 창간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에서 고종의 보수정권을 비판하고, 독립협회 간부로서 극렬한 반정부 데모를 조직·선동하고, 나아가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화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방에서 10㎏의 무거운 형틀을 쓰고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극한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그는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 미국과 한국에서 기독교 교육과 선교활동에 종사했고, 경천애인(敬天愛人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을 좌우명으로 받들고 살았다. 또 48년 5월 총선거를 기해 그는 방구명신(邦舊命新 : 나라는 오래지만 명은 새롭다)이라는 휘호를 남겼는데 여기서 명(命)은 기독교적인 하늘의 천명(天命)을 의미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건설함에 있어 기독교 교리 위에 전통종교(유교·대종교)의 장점을 포섭, ‘한국적 기독교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48년 5월 31일 임시국회의장으로 제헌국회 개원에 앞서 이윤영 의원(목사)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부탁했고, 대통령 취임식 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했다.

이승만이 꿈꾸었던 신생 한국은 모범적 기독교·민주주의 국가, 반소·반공의 보루, 평등사회·문명부강(文明富强)한 나라였다. 즉, 그는 신생 대한민국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최대한 보장된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또 정부 형태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했다.

그가 건국한 대한민국은 이런 토대에서 출발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6·25는 그의 이런 꿈에 커다란 시련을 줬다. 하지만 그는 민족의 최대 시련기인 6·25의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꿈을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북한공산당의 남침에 국권을 수호하고 국군장병에게 위안과 사기를 앙양시킬 군목(軍牧)제도의 도입이었다.

이대통령은 50년 12월 21일 대통령비서(秘書) 국방 제29호를 통해 육군본부에 군목제도를 설치한 데 이어, 51년 2월 27일에는 국본(國本)일반명령 제31호에 의거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軍僧課·과장 김득삼 대위)를 설치했다. 군승과는 51년 3월 10일 군목과(軍牧課)로 개칭되면서 김형도 목사가 과장에 보직됐다.

6·25 때 군목과는 장병의 사상·신앙·인격지도, 종교도덕 교육, 야전 예배를 수행해 장병의 전투의식을 고취시켰고, 국군이 종교적 신앙에 입각해 멸공성전(滅共聖戰)을 완수케 했다. 전후(54년) 군목과는 군종감실로 승격, 종교에 관한 제반업무를 수행했다. 이렇듯 이대통령은 반공과 한국의 기독교적 국가건설을 바탕으로 전시에 군종제도를 도입, 신앙 전력화를 꾀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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