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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2 08: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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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11>청년방위대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11>청년방위대
1949년 11월 창설…반공·치안 유지 협력

1949년 8월 6일 병역법 제정으로 예비군인 호국군을 해체했지만 징병제가 곧바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징병제의 시행은 50년 2월 1일 ‘병역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비로소 이뤄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청년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국내외 정세를 감안해 20만 명의 민병을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49년 11월 초, 병역법 제77조 “청년에 대하여 병역 편입될 때까지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규정에 의거, 청년방위대가 창설됐다.청년방위대는 당시 난립하던 청년단체의 통합을 위해 신성모 씨가 48년 결성한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창설한 것이다.

대한청년단은 청년방위대 창설 과정에서 주로 부대편성에 관여했으며, 50년 3월 초 청년방위대 조직을 위한 세부계획을 발표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도·군·면·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해 대부분의 청년들을 포섭했고, 여자청년단도 조직했다. 본격적인 군사조직이나 민병은 아니었지만 반공·치안유지에 협력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각 지부에서 선발한 제1·2기 간부요원 720명을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에 파견해 40일간의 훈련 후 예비역 소위로 임관,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로 전국에 배치돼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청년방위대가 창설되자 육군본부 교도국은 49년 12월 15일부로 청년방위국으로 개칭하고 청년방위대의 지도감독 업무를 맡았다.

12월 1일 인력 양성을 위해 충남 온양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를 설치한 뒤의 일이었다. 방위대 편성은 50년 1월 16일 김종평 대령이 초대 청년방위국장으로 부임한 후 본격화됐다. 그날 간부요원이 선발돼 간부훈련학교에서 1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방위소위로 임관한 후 충원됐다.대한청년단 배속장교, 호국군장교를 우선적으로 청년방위훈련학교 수정반에 보내 2주간의 교육을 통해 고급간부로 임용한 것이다.

부대편성은 전국 시·도 사단급에 해당하는 방위단을 설치하고 단장에는 방위중령을, 군 단위에는 연대급인 방위지대를 설치하고 지대장에는 방위소령을, 그리고 면 단위에는 대대급인 방위편대를 두고 편대장에 방위대위를, 그 밖에 중대인 구대를 두고 구대장에 방위중위를, 그 이하 소대에는 소대장으로 방위소위를 임명했다.

이로써 50년 3월 15일부로 육군본부 직할로 17개 단과 3개 독립단 등 20개 청년방위단의 부대편성이 완료됐다.한편, 50년 6월 10일 청년방위국을 폐지하고 청년방위대고문단을 설치했다.

초대 단장에는 송호성 준장이 부임했으며, 각단에는 고문관으로 현역 소위급 장교를 배치했다. 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49. 12. 1 설치)가 온양에서 경기도 수원의 옛 육군보충대 건물로 이동해 제5차 간부양성을 끝으로 같은 날인 6월 10일부로 폐교됐다.

그러나 청년방위대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던 중 전쟁이 일어나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장교가 현역에 편입됐고 대원들도 전열에 가담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악화될 무렵, 청년방위대는 국민방위군을 조직하는 근간이 됐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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