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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4 08: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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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61>미8군의 리퍼작전과 국군1군단장 전사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1>미8군의 리퍼작전과 국군1군단장 전사
전선 중앙 돌파…수도 서울 재탈환 성공

리퍼(Ripper·분리)작전은 킬러작전의 연장으로 미8군이 1951년 3월 7일부터 31일까지 실시한 공세작전이다. 작전개념은 미9·10군단이 중부전선에서 진격하고 미1군단이 서울 서쪽과 한강 남안의 전선에서 적을 견제 후 서울을 탈환하고, 국군1·3군단은 동부전선에서 적을 견제하며 후방 산악지대의 잔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미8군은 그동안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분쇄하고 킬러작전을 전개, 51년 3월 초에는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해 연결된 방어선을 확보했다. 이로써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 갖게 된 패전의식에서 벗어나 서울탈환은 물론 38도선 진출을 눈앞에 두게 됐다.

하지만 이때 서울 재탈환은 정치·심리면에서는 중요하나 유엔군의 증원이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희생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군사적 판단이었다. 이에 미8군은 현 전선의 중앙지역에 대돌파구를 형성, 일단 적의 전선을 양단해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을 분리시킨 다음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서울을 양익포위한다는 작전전략을 수립하고 작전명을 리퍼작전으로 명명했다.

미8군사령관은 춘천·홍천을 점령해 적의 전선을 차단·분리하고 서울을 양익포위하기 위해 주공인 미9군단은 홍천·춘천으로 공격하고, 조공인 미10군단은 운두령으로 공격해 주공의 우측방을 엄호케 했다. 미1군단 주력은 한강선에서 적을 고착·견제하고 일부는 천마산으로 공격해 주공군단의 좌측방 엄호와 서울 포위를 준비케 했다.

국군 1·3군단도 인접 미군과 협조된 작전을 하게 했다. 그 결과 미9군단은 춘천을 확보했고 서부의 미1군단은 서울을 탈환 후 임진강까지 진출했다. 동부의 국군1군단도 38선 이북 양양까지 진출했다. 이로써 유엔군은 문산~임진강 상류~동두천~춘천~현리~양양 북쪽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리퍼작전은 리지웨이가 ‘자신 생애의 최고 작전’으로 자찬할 정도로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동부의 국군1군단은 38도선을 돌파 북쪽으로 진출했고, 서부의 미1군단은 서울을 재탈환했다.서울 재탈환은 국군1사단과 미3사단에 의해 3월 15일 이뤄졌다.

국군1사단은 미8군사령관·미1군단장·신성모 국방장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강물을 가르며 여의도에서 마포로 도하해 서울을 재탈환했다. 이로써 국군1사단은 적도(敵都) 평양점령에 이어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영광을 얻었다.

리퍼작전이 끝날 무렵 리지웨이는 여주의 미8군전방지휘소에서 차후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미군은 각 군단장과 사단장, 국군은 정일권 총참모장·김백일1군단장·유재흥3군단장·미군단에 배속된 국군사단장(백선엽1사단장·장도영6사단장)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리지웨이는 ‘38선은 없다’고 했으나, 51년 3월 15일 미 합참의 38선에 대한 전략지침(38선 이북 16~32㎞ 내에서의 공세적 방어작전)을 강조했다. 이는 38선을 인정치 않으면서 제한 없는 북진도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회의 후 김백일 소장이 경비행기로 군단 복귀 중 대관령 산중에 추락해 전사(34)했다.

그는 3연대장·5여단장·옹진지구전투사령관·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3사단장·육본작전참모부장·1군단장 등 전투지휘관을 역임한 군내 몇 되지 않는 작전통이었다. 그의 불운한 죽음은 한 달 전 킬러작전 때 전사한 미9군단장에 이어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정부는 그의 드높은 전공을 기려 중장(中將)에 추서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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