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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5 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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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7>공군 창설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7>공군 창설
육군항공부대 토대 1949년 10월1일 독립

8·15 광복 직후, 항공인들이 뜻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항공부대 창설을 추진했다. 그들은 미 군정청과 통위부를 설득해 1948년 5월 육군항공부대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49년 10월 1일 공군을 창설했다. 스스로를 ‘신념의 조인’(鳥人)이라 했듯이 오직 일념으로 공군 창설에 진력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군정 당국은 경력에 상관없이 미국식 교육훈련을 요구했다. 이에 48년 4월 1일 최용덕·이영무·장덕창·박범집·김정렬·이근석·김영환 등 7명의 간부가 수색에 위치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했다. 1개월의 기본교육 후 그들은 다시 경비사관학교에서 2주간의 교육(육사6기 상당)을 거쳐 소위로 임관, 항공부대 창설의 주역이 됐다.

공군 일지에 의하면, 항공부대는 48년 5월 5일 수색의 조선경비대 제1여단에서 통위부 직할로 창설됐다. 백인엽 소령이 이끈 부대는 6월 23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로 예속돼 ‘항공기지부대’라고 했다. 후임 부대장 최용덕 중위는 취임사에서 “하늘은 우리의 활동지, 하늘 있는 곳에는 우리가 있다”며 독려했다.

그 무렵 일본 항공사관 출신 박원석·장지량(이상 육사5기)과 신응균 외 77명(군번 3200001~78)의 항공병(제1기)이 확충됐다.얼마 후 부대를 ‘항공기지사령부’라 개칭하고 김포 송정리로 옮겼다. 그리고 9월 1일 김포비행장으로 이동, 기지 근무에 들어가 ‘공군 발상지’를 닦았다. 사령부 예하에는 비행부대와 항공기지부대를 뒀고, 미군 연습기 10대를 인수해 역사적인 첫 비행훈련을 실시했다.

9월 15일, 여의도 기지를 떠난 10대의 L - 4기가 편대로 서울 상공을 전시 비행했다. 동 부대 출신의 최용덕 국방부차관은 “내 나라 강토 안에서 태극기를 그린 비행기로 조국의 하늘을 마음껏 날았으면 하던 염원을 오늘에야 성취했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한편 48년 12월 1일 국군조직법에 의거 항공기지사령부는 육군항공사령부로 개편됐다. 그리고 49년 1월 14일 항공사관학교를 설치, 장교 42명과 병 1192명을 육성해 항공부대를 확장했으나 바로 공군독립이 이뤄지진 않았다.

“공군이란 육군의 비둘기 통신대”라며 반대도 있었으나 간부들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들의 숙원은 당시 항공사관학교장 김정렬의 저서 ‘항공의 경종’(警鐘)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군이 삼발이의 일각으로 육·해군과 정립할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고,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 세계 어느 나라나 공군은 독립돼 있다.”

49년 6월 28일 용산우체국 뒤편에 위치한 국방부 별관 내에 항공국이 신설됐다. 8월 15일에는 항공부대가 정부 수립 기념으로 공중 분열식을 실시했고, 9월 15일 여의도 기지에서 ‘제1회 항공의 날’을 기념하며 그 면모를 과시했다. 결국 정부와 미 고문단 측이 절충안을 제시하며 공군 독립을 결정했다.

마침내 49년 10월 1일 공군 독립이 이뤄졌다. 공군본부직제(대통령령 제254호)로 공군본부(국방부 별관)가 설치됐고, 총참모장에는 김정렬 대령이 보직됐다. 병력 1100명에 20대의 연락기를 보유한 전력이었다. 이로써 국군은 육·해·공군의 3군 체제를 이뤘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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